개혁주의교육학, 루이스 벌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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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혁주의교육학, 루이스 벌코프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어린이가 커리큘럼에 예속되는 그러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때만, 인격은 어떤 진정한 발전의 기회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인격에 대한 비기독교적 개념
인격과 그것의 발달 가능성에 관한 이러한 문제는 우리의 반대자와 우리 자신들 사이에 논쟁의 정점이 되고 있다. 우리와 같은 커리큘럼의 타입을 갖고서는 인격발달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그들의 비난에 대하여 우리는 뭐라고 답변해야 하는가? 우리는 한번 더 궁극적인 선택을 직면해야 함이 확실해 진다.
빈 젖꼭지를 빠는 아기들. 교육철학을 논의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반대자들이 사실 우리의 입장을 완전히 지지할 수 없는 입장으로 생각하며, 또 우리는 우리의 반대자들의 입장이 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커리큘럼의 논의에서, 우리는 무신론적 기반 위에서 도대체 어떠한 것이 가르쳐 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진정한 잇슈였다. 그리고 우리가 커리큘럼의 구성에 있어서 편협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르칠 수 없다고 반대자들의 비난에 대한 답변이다.
우리의 교육체계 하에서는 인격의 발달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비난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바로 그와같이 주장하는 그들의 교육체계 하에서는 전혀 인격발달을 꾀할 수 없다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전면(全面)에 내세워 온대로, 우리는 전적으로 긍정적이며 건설적이 되기 위하여 먼저 철저한 부정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순수한 양육. 우리가 우리 반대자들의 교육체계 하에서는 인격이 발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본대로 그들의 주장하는대로라면, 유한한 인격이 완전히 비인격적 분위기 가운데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장은 유한한 인격은 그것이 절대적인 인격과 대면하는 위치에 놓이지 않는 한 발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공간적 사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놓이지 않고는,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인격은 시-공간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특이하게, 이 우주 속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놓이지 않고는 알려질 수 없다는 사실이, 인간 인격의 경우에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당신은 합리성에 대한 생각 없이는 인격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유한된 합리성은 그 자체를 생각할 수도 없고, 의미도 없다. 유한된 인격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공허한 의미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비인격이 인격에 대한 장식이 될 수 없다. 인격이 완전한 의미에서 파악되었다면, 그 인격은 전적으로 자족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인격이 유한된 의미로 파악되었다면, 인격은 비인격을 그것의 장식으로 가질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비인격 장식의 배후에 완전하신 하나님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가정(假定)하에서이다.
모든 상반성을 없애버리고, 우주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중립적인 우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비기독교적 교육철학의 비인격주의였다. 이제 다시 유한된 인격을 무(無)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역시 이와 같은 궁극적인 비인격주의이다. 그렇게 될 때 어떠한 인격의 발달진행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유한된 인격이 하나님과 대면하는 위치에 있지 않으므로, 유한된 인격이 배워야 하는 “사실들” 혹은 유한된 인격이 조정받아야 하는 환경이 하나님과 대면하지 않는 위치에 두어진다면, 지식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 어떤 결실 있는 접촉도 가능할 수 없다. 정말 지식을 가지려 한다면, 아는 자와 알려진 것 모두가 하나님과 접촉해야 한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이 둘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
권위에 대한 비기독교적 부정
이것은 교육에 있어서의 권위의 문제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말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가르치는 관계는, 그가 그의 해석을 완전한 진리로서 나타낼 어떤 권위를 갖도 있는가 하는 의문을 곧바로 낳는다. 정말 권위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권위를 행사할 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하는 일이 되지 않는가? 우리의 반대자들은 엄밀하게 말하여 권위와 자유는 상호 배타적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들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조금 더 안다고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의미의 권위 즉 법적 권위에 대해서는 전문가적 권위만큼 용납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전문가적 권위. 이제 우리는 법적 권위를 전문가적 권위의 대용물로 변호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 반대자들의 바탕 위에서라면 권위란 전혀 없는 것이고, 권위가 없기에 교육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 반대자들의 바탕에 권위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바탕 위에는 지식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서 분명해 진다. 그리고 만약 지식이 존재할 수 없다면 전문가적 지식 역시 불가능하다.
진정한 권위. 권위란 유한한 인간의 인격 앞에 완전한 하나님의 인격을 두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르쳐지지 않는 한 아무것도 가르쳐 질 수 없으며, 권위를 가지고 가르쳐지지 않는 것은 가르쳐질 수 없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바로 이것이 교사의 위치를 그토록 한없이 어렵게 만드는 동시에, 그토록 무한히 값있게 해주는 점이다. 우리 반대자들의 바탕 위에서라면 교사의 위치란 전혀 소망적이지 못하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권위 없이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과 그가 호소할 수 있는 권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어린이를 무한한 가능성의 연속선 앞에 두어야 하고, 그러한 가능성들과 관련하여 취해야 할 가장 현명한 태도에 대하여 무언가 말해 줄 수 있는척 해야 하는 동시에, 그는 그러한 가능성들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결과, 어린이는 그가 살 수 있고, 성장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받지 못하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크리스천 교사는 자신을 알고 과목들을 알고 있으며, 그리고 어린이를 안다. 그는 자신의 사역에 대한 완전한 결실이 있을 것을 충분히 확신하고 있다. 그는 영원한 보상에 대한 여명 속에서 수고한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1.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16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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