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공민왕의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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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 공민왕의 일대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력은 사승이니 요승이니 하면서 그를 깎아 내리고 공격하였다.
그런데 신돈은 모반죄로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그에 의해 개혁의 대상으로 몰렸던 세신대족·초야신진·유생 등의 기득권 세력은 다시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다. 신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이들에 의해 덧칠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신돈을 깎아 내림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이들에 의해 그것이 확대·재생산되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禑王: 1374∼1388)이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주장만 해도 그렇다.
《고려사》에서는 우왕과 그 아들인 창왕(1388∼1389)의 기록을 〈열전〉 반역조(條)로 분류하고 있다. 두 왕이 신돈의 자손으로서 왕위를 도둑질하였기 때문에, 다른 왕들의 기록과 같이 〈세가〉에 모아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왕의 출생이 그와 전혀 무관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신돈을 제거하면서 이전까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우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신돈의 집에서 데려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공민왕이 당시 일곱 살이었던 우를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책봉할 때에 어느 누구도 우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우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그를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은 제기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왕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함께 폐위될 때에도 그의 정통성이 부정되지는 않았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은 창왕 1년(1389) 11월에 우왕이 이성계를 죽이고 복위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었을 때 비로소 제기되었다. 이성계 일파가 공양왕(1389∼1392)을 즉위시키면서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33) 다시 말해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은 이성계 일파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성계는 공양왕도 쫓아내고 결국 고려까지 멸망시키지 않았던가! 그리고 《고려사》가 이성계를 창업군주로 하는 조선시대에 그 신료들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던가!34)
백보를 양보하여 신돈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그의 개인적 행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승려였던 그가 끊임없이 성 추문을 일으키고 있었고, 아들까지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유교에서 치국의 도를 구하는 고려에서 그가 도덕적 결백이 요구되어지는 승려였기 때문에 지워진 부담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 행태 때문에 민생의 안정을 위해 그가 추구한 개혁까지 부정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조선 건국의 주도세력들마저도 신돈이 추구했던 개혁에서 그 개혁의 방향을 찾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특히 그렇다.
사진 및 그림 자료
공민왕릉 [恭愍王陵]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무덤.
지정번호 :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23호
소재지 :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시대 : 고려시대
종류/분류 : 분묘유적
[출처] 공민왕릉 [恭愍王陵 ] | 네이버 백과사전
공민왕이 그린 이양도 [二羊圖]
김광국의 석노화원으로 수집된 그림으로 비교적 신뢰도가 있다고 할수 있다.
상당히 세밀한 영모화로 비록 작은 잔편이지만 고려말 조선초기의 영모화를 추측할 수 있는 진 귀한 작품
이양도와 관련된 기사
http://blog.daum.net/biocode/1753
공민왕이 그린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安東雄府(안동웅부)라 쓰인 안동부 현판 제액, 공민왕이 썼다.
천산대렵도
시대 : 고려/고려 후기
성격 : 산수화
창작연도/발표연도 : 고려 후기
작가 : 공민왕
지역(소장처/전승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6가 168-6
재질 : 비단
관리자 :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산수화. 비단바탕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산(白山) 또는 설산(雪山)이라고도 불리는 천산(天山)에서의 수렵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기위도
두암 김용두 선생의 소장품이었던 관계로 일찍 국내에 알려진 작품이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전승된듯 한데, 공민왕의 그림이라고 전하지만 그 유 래가 확실하지 않다. 위 두 그림이 비교적 공민왕으로 인정되는 반면 같 은 ‘전 공민왕’이지만 거의 필자미상으로 보아지고 있다. 원체화풍이 강하 게 느껴지는 인물산수화로 그림상태는 좋지 않으나 대작이고 솜씨 또한 출중하다. 특히 인물묘사는 박진감이 있어 바둑을 둬본 사람이라면 그 진 행과정이 어디인지 짐작케 할만하다. 배경 산수는 도시적인 편으로 화가 는 인물에 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공민왕 영정 (恭愍王 影幀)
고려의 31대 임금 공민왕 (1330~1374)과 그의 부인인 노국 공주를 종이 바탕에 그린 영정이다. 이 그림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종묘 (宗廟) 창건 (1395, 태조 4) 당시 경내의 신당 (神堂)에 봉안 (奉安)했던 것인데 임진왜란 (1592~1598)으로 불타버리자 광해군 때 건물을 복원하면서 이모 (移模)한 것이라고 한다. 그림에는 공민왕과 왕비가 마주보듯 앉아 있으며, 공민왕은 복두 (頭)를 쓰고 홍포단령 (紅袍團領)에 홀을 들었다.
공민왕의 수복영토
고려의 제 31대 공민왕은 원명교체기를 이용하여 반원 자주 정책을 폈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 탈환(1356년)을 시작으로 원나라에 빼앗겼던 영토를 무력으로 탈환한 지역을 나타낸다.
[참고문헌 및 출처사이트]
http://blog.naver.com/youltae?Redirect=Log&logNo=20161251885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2725
http://blog.daum.net/biocode/1753
http://dankoon2001.blog.me/6012065445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3119&mobile&categoryId=1634
http://blog.naver.com/oaoa?Redirect=Log&logNo=15529912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년 2월 25일, 68~73

키워드

  • 가격3,300
  • 페이지수26페이지
  • 등록일2013.03.13
  • 저작시기2012.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33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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