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발표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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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안중근 발표문-1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안중근 의거의 배경
1) 의거의 국제정치적 배경
2)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3. 안중근의 활동
1) 의거의 준비와 하얼빈 의거
2) 제3자의 저격설 혹은 이중저격설
4. 안중근 의거의 의의
5. 맺음말

본문내용

서 제국주의의 정책적 전환을 촉구하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일본의 보호를 원한다는 식으로 국제사회에 선전하고 있었는데 그 의거는 대한제국이 결코 일본의 보호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시켰다. 이것은 안중근이 의거 현장에서 우리말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지 않고 ‘우라 까레야’를 외치고 자진해서 체포된 것과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은 한국의 의병이기 때문에 적국의 포로로서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되어야 한다고 주장’ 이기웅,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파주: 열화당, 2010) 342쪽
한 것, 그리고 “나는 개인으로 남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의병참모중장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하얼빈에 이르러 전쟁을 일으켜 습격한 뒤에 체포가 되어 이곳으로 온 것”을 강조한 하면서 국제공법에 따라 전쟁포로로서 대우해줄 것을 당당하게 요청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거는 일본이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한국이나 중국의 지속적인 저항과 독립전쟁으로 동양평화는 깨어질 것이기 때문에 평화를 유지하려면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을 중단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는 동시에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의 약소국 침략정책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며, 특히 한국에 대한 열강들의 야만적 합의, 즉 영·일 동맹이나 미·일 간의 테프트-카스라밀약 과 같은 협약을 통하여 서로 의 이익을 위하여 약소국을 짓밟는 불의에 대한 국제적 고발이었다. 그가 하얼빈 의거로 체포된 후 옥중투쟁의 일환으로 작성한 동양평화론도 역시 일제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리는 동시에 식민지 개척에 광분하는 제국주의 열강에 일침을 가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는 재판과정에서 이토를 처단한 이유에 대해서 “나는 조선을 위해, 나아가서는 세계를 위해 이토를 죽인 것이지 명에를 위해 행한 것은 아니다.” 이기웅, 앞의 책, 85쪽
라고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라는 대의를 강조함으로써 사적인 동기와 의도를 부각시키려던 일제 검찰의 태도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이 이토를 처단한 이유로 ‘15개항의 죄상’ 그 핵심내용은 야만적인 명성왕후 시해,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을사조약의 체결, 한국황제의 폐위, 한국군대의 해산, 양민학살, 각종이권의 약탈,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과서의 소각, 신문구매금지, 동양평화질서의 교란, 식민지정책의 기만성, 일본 청황의 부친 시해 등이다.(서울: 안중근의사숭모회, 1979), 174~175쪽
을 열거하면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이 가운데 동양의 평화와 관련하여 ‘동아시아의 평화를 파괴한 죄’와 ‘한국의 독립과 동아시아의 평화유지를 위해 전쟁을 한다고 밝힌 후 모든 열강을 기만한 죄’등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이기웅, 앞의 책, 34쪽
즉 안중근의 이토 처단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 동양의 평화를 위해 거행한 의거였다. 안중근이 법정에서 ‘일본국민을 구원하기 위해 이토를 처단했다’고 한 것은 동서양을 더나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과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자는데 그 기저를 두고 있던 그의 동양평화론에서 근거한 것이었다. 장석홍, 안중근의 독립운동 구상과 의거의 성격, 1017~1020쪽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입각한 사상은 인도주의 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고 당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던 국민들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맺음말은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하겠다. 안중근이 처해 있던 시대는 약육강식의 논리와 힘에 의해 서열이 정해지는 변칙과 격변의 시대였다.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가장 먼저 문명개화를 시작한 일본은 자신을 맹주로 하는 새로운 동아시아질서를 구축하려는 목적으로 아시아연대론을 표방하면서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러일 전쟁에서도 승리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가속화하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을 추진하였다.
이토가 주장한 동양평화론은 대륙침략론이었던 아시아연대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안중근은 이토의 한국 침략정책이 동양평화의 걸림돌이라고 인식했다. 안중근에게 평화란 모든 국가들이 자주독립의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했다. 안중근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국권을 반환해야 하며, 청국에 대해서는 여순을 반환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대외정책을 전환하여 평화회의에 참여한다면 일본은 전쟁을 통하지 않고도 동양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동양평화론』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의 『동양평화론』은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됨으로써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의병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안중근은 연추지역에서 열린 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곳에서 활동하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시찰을 온다는 외신을 접하고 이토히로부미의 포살을 계획하였다. 안중근은 이 때 그 실행 책임을 맡을 것을 자원하였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성공하였다.
안중근의 이토 사살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무로타설을 근거로 들어 제3저격설, 2중저격설 을 이야기 하지만 이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날조·왜곡된, 일본인의 편견이나 그릇된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 3자 저격설 혹은 이중저격설은 일본 내에서도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고 있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인 동시에 ‘국제적인 사건’이었다. 안중근의 이토처단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래 한국의 독립, 동양의 평화를 위해 거행된 의거였으며 국제사회에 일본의 침략 만행과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정책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안중근 의거는 일본이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을 포기하지 않는 한 동양의 평화는 깨어질 것이기 때문에 일본이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을 중단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는데 이것은 제국주의 열강에게 보낸 경고이기도 하였다. 안중근의 이토 포살은 인도주의적 의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던 세계 여러나라 국민들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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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3.29
  • 저작시기2012.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36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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