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청일전쟁의 배경과 원인.
1. 청일전쟁의 배경
2. 청일전쟁의 원인
(1)일본의 주권선과 이익선론.
(2)조선정부의 이기적 태도, 외교력 부재
Ⅱ. 청일전쟁의 전개.
1. 전쟁상황
2. 청일 전쟁 중, 조선정부의 태도 변화.
Ⅲ. 청일전쟁의 결과.
1.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1) 일본의 이익.
(2) 국제정세의 변화.
(3)조선의 변화.
Ⅳ. 청일전쟁으로 인한 피해.
1. 청의 피해.
(1) 뤼순학살.
(2) 뤼순학살에 대한 일본 측 입장.
2. 조선의 피해.
(1) 인적 피해
(2) 경제적 피해
1. 청일전쟁의 배경
2. 청일전쟁의 원인
(1)일본의 주권선과 이익선론.
(2)조선정부의 이기적 태도, 외교력 부재
Ⅱ. 청일전쟁의 전개.
1. 전쟁상황
2. 청일 전쟁 중, 조선정부의 태도 변화.
Ⅲ. 청일전쟁의 결과.
1.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1) 일본의 이익.
(2) 국제정세의 변화.
(3)조선의 변화.
Ⅳ. 청일전쟁으로 인한 피해.
1. 청의 피해.
(1) 뤼순학살.
(2) 뤼순학살에 대한 일본 측 입장.
2. 조선의 피해.
(1) 인적 피해
(2) 경제적 피해
본문내용
본의 점령직후 부녀자와 유아를 포함해 6만명이 학살되었고 생존한 주민은 36명에 불가하다고 하였으며 더월드의 제임스 크릴만 기자는 일본은 문명의 가면을 벗고 야만의 모습을 드러낸 괴물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2) 뤼순학살에 대한 일본 측 입장.
뤼순학살에 대한 국제 여론의 비난이 쏠리자 일본정부는 12월17,18일간에 걸쳐 8개조에 달하는 공식적인 변명을 발표하나 군대에 대해서는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았다
내각총리대신 이등박문의 이름으로 해외언론에 발표한 8개조 성명(요약)
1. 퇴각 중이던 청측의 병사들이 군복을 벗어던지고 도주하였다.
2. 뤼순에서 살해당한 대부분은 상기의 군복을 벗어버린 병사들이다.
3. 시가의 주민들은 이미 교전이 있기 전에 대피해 있었다.
4. 피난을 떠나지 않았던 자들은 청국 정부로부터 교전할 것을 명령받은 자들이었다.
5. 포로가 되었던 일본군병사들이 잔혹한 고문을 받았음을 알게 된 다른 병사들이 이성을 잃었다.
6. 일본 측은 어디까지나 군 기강을 지키고 있었다.
7.크릴만 이외의 외국기자들은 그의 보도내용에 오히려 놀라고 있다.
8.뤼순 함락 시에 사로잡힌 포로 355명은 정중한 대우를 받으며 2,3일 내에 도쿄로 호송 될 것이다.
피해에 대한 공식입장은 중국 측 1만8천명에서 2만명 일본군 2천명에서 6천명으로 추산하고있을뿐 정확한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2. 조선의 피해.
(1) 인적 피해
-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이유로 조선으로 출병한 일본군은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의 인부들을 강제로 전쟁에 동원 하였다. 당시의 이동수단은 우마차가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는데, 일본은 조선 인부들과 우마차의 강제 징발을 단행하였다. 국방군사연구소.[청일전쟁은 왜 한반도에서 일어나야 했는가] 1994년. p 112
일본군의 이와 같은 인적·물적 수탈은 1894년 8월26일 강제체결한 한일양국동맹에 기인한다. 일본군의 군수품의 운반이 한반도에서 실행되고 있었기에 청일전쟁의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일어나게 됐음은 당연한 결과이다.
또한, 조선인 인부들 가혹한 노역을 당하였다. 원산에 상륙한 일본군 22연대는 찌는 듯한 더위가 진행되던 8월, 강행군을 강제하였고 이로 인해, 인부들이 전염병과 피로로 무참히 쓰러져 죽어갔다고 한다. 병본이삼부, [일청전쟁종군필록], 청춘출판사, 1972, P 37
일본의 군수품 조달을 담당함으로써 한반도는 일본군의 병참기지화로 인해 인적·물적·정신적 고통을 함께 받게 되었다.
(2) 경제적 피해
-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평양성 내에 있던 값비싼 금은괴를 약탈하였다. 다량의 금을 약탈해 간 일본은, 다음 해인 1895년부터 금 수출량이 급증하였다. 1894년 95만달러 였던 금 수출량이 1895년에는 136만달러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국방군사연구소, 위의 책. p 117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일본은 조선정부의 내정개혁을 강요하는 동시에 서울과 주요항구간의 철도를 건설하도록 압박하고 철도부설권을 일본에 양도하도록 강제하였다.
통신시설에 관한 수탈도 있었다. 1894년 조선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과 인천간에 군용전신선을 개통시켰다. 이에 조선군이 이 통신선을 절단 하였는데, 이 절단 행위자를 체포하여 처벌하였다. 일본외교문서, 제27권, 제1책, p 590
이후, 청일전쟁을 시작한 뒤에는 조선의 전신선을 일본군 전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1945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국방군사연구소, 위의 책. p 121
일본의 경제적 수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개항장까지 강제 탈취 하여 결국, 한반도를 군수기지화 및 주권상실국으로 만드는 단계로 나아갔다.
(2) 뤼순학살에 대한 일본 측 입장.
뤼순학살에 대한 국제 여론의 비난이 쏠리자 일본정부는 12월17,18일간에 걸쳐 8개조에 달하는 공식적인 변명을 발표하나 군대에 대해서는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았다
내각총리대신 이등박문의 이름으로 해외언론에 발표한 8개조 성명(요약)
1. 퇴각 중이던 청측의 병사들이 군복을 벗어던지고 도주하였다.
2. 뤼순에서 살해당한 대부분은 상기의 군복을 벗어버린 병사들이다.
3. 시가의 주민들은 이미 교전이 있기 전에 대피해 있었다.
4. 피난을 떠나지 않았던 자들은 청국 정부로부터 교전할 것을 명령받은 자들이었다.
5. 포로가 되었던 일본군병사들이 잔혹한 고문을 받았음을 알게 된 다른 병사들이 이성을 잃었다.
6. 일본 측은 어디까지나 군 기강을 지키고 있었다.
7.크릴만 이외의 외국기자들은 그의 보도내용에 오히려 놀라고 있다.
8.뤼순 함락 시에 사로잡힌 포로 355명은 정중한 대우를 받으며 2,3일 내에 도쿄로 호송 될 것이다.
피해에 대한 공식입장은 중국 측 1만8천명에서 2만명 일본군 2천명에서 6천명으로 추산하고있을뿐 정확한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2. 조선의 피해.
(1) 인적 피해
-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이유로 조선으로 출병한 일본군은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의 인부들을 강제로 전쟁에 동원 하였다. 당시의 이동수단은 우마차가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는데, 일본은 조선 인부들과 우마차의 강제 징발을 단행하였다. 국방군사연구소.[청일전쟁은 왜 한반도에서 일어나야 했는가] 1994년. p 112
일본군의 이와 같은 인적·물적 수탈은 1894년 8월26일 강제체결한 한일양국동맹에 기인한다. 일본군의 군수품의 운반이 한반도에서 실행되고 있었기에 청일전쟁의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일어나게 됐음은 당연한 결과이다.
또한, 조선인 인부들 가혹한 노역을 당하였다. 원산에 상륙한 일본군 22연대는 찌는 듯한 더위가 진행되던 8월, 강행군을 강제하였고 이로 인해, 인부들이 전염병과 피로로 무참히 쓰러져 죽어갔다고 한다. 병본이삼부, [일청전쟁종군필록], 청춘출판사, 1972, P 37
일본의 군수품 조달을 담당함으로써 한반도는 일본군의 병참기지화로 인해 인적·물적·정신적 고통을 함께 받게 되었다.
(2) 경제적 피해
-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평양성 내에 있던 값비싼 금은괴를 약탈하였다. 다량의 금을 약탈해 간 일본은, 다음 해인 1895년부터 금 수출량이 급증하였다. 1894년 95만달러 였던 금 수출량이 1895년에는 136만달러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국방군사연구소, 위의 책. p 117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일본은 조선정부의 내정개혁을 강요하는 동시에 서울과 주요항구간의 철도를 건설하도록 압박하고 철도부설권을 일본에 양도하도록 강제하였다.
통신시설에 관한 수탈도 있었다. 1894년 조선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과 인천간에 군용전신선을 개통시켰다. 이에 조선군이 이 통신선을 절단 하였는데, 이 절단 행위자를 체포하여 처벌하였다. 일본외교문서, 제27권, 제1책, p 590
이후, 청일전쟁을 시작한 뒤에는 조선의 전신선을 일본군 전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1945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국방군사연구소, 위의 책. p 121
일본의 경제적 수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개항장까지 강제 탈취 하여 결국, 한반도를 군수기지화 및 주권상실국으로 만드는 단계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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