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이 건설해준 해상왕국 유구(류쿠)왕국의 동아시아 관계와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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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인들이 건설해준 해상왕국 유구(류쿠)왕국의 동아시아 관계와 비극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2.1 유구 소개
2.2 유구왕국 역사
2.3 韓人들이 건설해준 海上王國
2.3.1 유구왕국의 건국 기초를 세워준 삼별초
2.3.2 조선의 제도와 문물을 전수받다.
2.3.3 이상국을 건설한 전설적 영웅 홍길동
2.4 유구왕국의 중개무역과 동아시아 관계
2.4.1 유구왕국의 중개무역
2.4.2 한국과의 관계
2.4.3 중국과의 관계
2.4.4 일본과의 관계
2.5 유구왕국의 비극과 독립국을 꿈꾸는 유구 후손들
3. 결론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을 겪는다. 2차 대전이 종국으로 치달을 무렵 미국은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해 오키나와에 상륙을 감행하고 이 과정에서 남녀노소 17만 명의 목숨을 잃는 대참사가 발생한다.
이어 1945년 4월부터 니미츠(C.W. Nimitz)포고에 의하여 미군정이 시작되고 거대한 미공군기지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일본 패망 후 1952년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도 오키나와는 계속 미국의 영토로 되어 있어 그 후 미일 양국의 현안 문제로 존재해 왔다.
이것이 다시 일본으로 귀속된 것은 1972년 일이다. 당시 닉슨 미국대통령은 미국의 국제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동맹국들의 책임 분담을 요구하는 정책을 폈다. 이에 오키나와 반환교섭이 급진전됐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과 일부 야당은 반환과 함께 미군기지 철폐 또는 축소, 특히 핵기지의 완전 철폐를 요구하여 미국과 일본 양쪽 정부와 충돌했다. 이 때 오키나와내에는 일본과 단절하려는 오키나와 독립론이 일어나 신문에는 '류큐 민족의 독립을 절규한다'는 기사가 살리기도 했고 류큐 독립당이 결성되기도 했다.
일본 자민당과 사토 내각은 이들의 주장을 묵살한 채 국회에서 비준 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고
1972년 5월 비운의 땅 오키나와는 다시 일본의 영토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비극은 일본의 유구인에 대한 차별 등으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게 되고 류쿠독립운동 류큐독립운동(琉球獨立運動, 일본어: 琉球立運動(りゅうきゅうどくりつうんどう))은 오키나와 현과 류큐 제도가 일본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운동이다. 1945년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후에, 일본에 점령되었던 류큐 왕국(琉球王國)의 귀속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미국이나 일본으로의 편입이 아닌, 류큐공화국(琉球共和國, Republic of the Ryukyus)이란 한 국가로서의 독립국가를 주장하는 운동이며, 현재에도 진행중에 있다.
을 펼치게 되었으며 현재도 진행중에 있다.
‘오키나와팀과 일본팀이 운동시합을 할 경우, 어느 팀을 응원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오키나와팀 응원 94.1%, 일본팀 응원 2.1%라는 답이 나왔다. 이것은 단순한 응원이 아닌, 오키나와 사람들의 가슴 속 깊이 박혀있는 응어리(?)가 돌출된 것으로 보여진다.
오키나와 류큐대학의 한 조교수가 실시한 현주민의 의식조사에서 나온 데이터다. 이 조사에서 오키나와현 주민의 4명중 1명이 「오키나와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독립하지 않아야 한다」는 대답이 월등(65.4%)하지만, 응답자의 23.9%가 자신의 마음속으로는 일본과의 독립을 원하고 있었다.
이 조사는 현주민의 정체성에 관한 의식을 탐문하기 위해서 18세 이상의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한 1,200명으로부터 나온 답이다.(서일본신문, 11.28)
‘그렇다면 독립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더욱 놀랍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이 일본과 다르기 때문이다」가 48.9%나 되었다.
또한,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은 즉.
① 오키나와인(人)인 동시에 일본인이다 40.1%
② 오키나와인(人)이다 30.3%
③ 일본인(人)이다 28.6%
(기타 1.0%) 라는 대답이 나왔다.
이렇듯 4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구왕국이 전쟁의 상처와 지역차별의 아픔 때문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3. 결론
본론에서 언급한
"유구 왕국 왕성인 수리성 정전에는 ‘삼한(三韓)의 빼어남을 모으며, 대명(大明)·일역(日域)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내용의 명문이 있다."
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문화를 수용하되 한국을 으뜸으로 삼고 중국·일본을 그 다음으로 여긴다는 뜻.
역사가 길지 않지만 한국에 의해서 건국의 기초를 다진 유구 왕국, 유구 왕국 멸망까지 한국에 대한 예의와 한국의 영원한 동맹국으로서의 유구 왕국, 한 때 동서남아시아와 동아시아의 중개무역으로 찬란히 꽃 피웠던 유구 왕국이 지금은 사라지고 일본의 하나의 현, 일본인으로서 어쩔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비운의 유구 왕국.
"유구 처분"이 우리의 "한일합방"과 같으며 한일 합방이후 한반도에서 시도된 식민통치의 거의가 유구에서의 경험을 근거로 시도된 것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유구처분"에 의한 나라를 잃고, 일본의 일개 현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 땅의 백성들의 아픔과 상처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엄연히 다른 민족이고 다른 문화를 가진 유구 왕국, 그들은 삼별초가 건국의 기초를 다져주었으며 조선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홍길동이 건설한 율도국이 바로 유구에 있었다는 의견들은 현재 많은 연구 결과로 사실로 입증되고 있으며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유구는 역사적으로나 국민성, 문화, 건축양식과 그들의 삶 속에 남아있는 풍습들 까지 이러한 이유들로 우리 한국과 너무나 닮았다.
한 때 우리의 영원한 우방이었던 유구 왕국. 나라는 사라졌어도 그들의 정신과 역사는 고스란히 기억하고 간직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또한 우리들도 이러한 유구의 역사를 잘 알고 일본 문화를 가진 일본의 나라라는 생각을 저버리고 그들은 엄연히 일본과는 다른 독립 왕국 이었으며 우리 에 의해 건국의 기초를 다졌고 우리와 너무나 가까운 나라였다는 사실을 인식해 주었으면 한다.
4. 참고 문헌
″조선과 유구.
하우봉, 손승철, 이훈, 민덕기, 정성일
″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
탁석산
″잃어버린 왕국1 (비밀의 문).
최인호
″수신제가.
둥예쥔
″오키나와의역사와문화.
호캄마슈젠
″실존인물 홍길동.
설성경
″오키나와, 독립하다!
권혁태
″하룻밤, 미스터리를 찾아서.
SBS 백만불 미스터리 제작팀
″섬 사람들의 역사.
조지 H 커
″조선왕조실록.
″『역사적으로 유구(오끼나와)는 한국의 속령』
김용필
″『오키나와의 고려 기와와 삼별초』
윤용혁
″『홍길동의 이상향, 오키나와』
손승철
″『일본의 유구병합과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
강상규
″『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갔는가』
노형석
″『잠재주권과 "재일(在日)"의 딜레마 -점령 초기 오키나와의 지위와 정체성-』
임성모
″『조선왕조와 유구왕조의 역사와 문화 재조명 』
한국오키나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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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4.17
  • 저작시기2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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