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대명의리론의 전개~ 북학론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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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후기 대명의리론의 전개~ 북학론의 전개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조선 후기 대명의리론의 전개~ 북학론의 전개


대명 의리론의 배경
<<척화론>>
<<주화론>>
삼전도 굴욕[인조실록]
대청 복수론의 설정
예송논쟁
대명의리론의 강화
존주론의 구현과 정치
조선 문화의 중흥
새로운 시대사상-북학사상의 형성
새로운 사회계층- 중인층의 성장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들은 사대부들의 필수 교양인 시, 서, 화에 일가를 이루며 동인들의 시사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문학활동을 벌인다. 이 시사가 개최하는 백전이라는 백일장 행사는 국가적 성사가 되기도 하였다. 이곳이 서대(西臺)로 구분되는 대 비하여 남부로 일컬어지던 광교 일대의 청계천 부근은 부유한 기술직 중인의 세거지였다. 특히 연행하의 수행원으로 사무역에 종사함으로써 막대한 축재를 한 거부가 출현하였는데 박지원의 허생전에 등장하는 변승업은 이러한 부자로 실존인물이었다. 이들은 중인계층의 최상위층으로 그들의 재정적 후원자의 역할을 하였다. 서얼들이 정치운동 성격의 통청운동, 이서층이 문화운동 측면인 위항문학운동, 기술직 중인이 경제 운동의 역할을 각각 분담하였다고 볼수 있는데 이것들은 상호 연계하에 상승작용을 하였다. 정부는 이서층인 경아전 중심의 위항문학운동에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의식있는 사대부들은 문화 저변의 확대로서 적극 후원하였다. 이들은 19세기에 이르러 북학사상을 수용하여 조선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양반사대부 계층에 대체되는 사회세력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북학을 방법론으로만 이해하여 사회변혁세력화에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후 일제의 강점으로 그 역동성은 좌절되었다.
결론
18세기 조선문화의 융성은 17세기 국가재건의 방향성에 기인하였다. 일본과 청나라의 무력에 굴복하였지만 무력국가로 가는것이 아닌 도덕국가 내지 문화국가로 가야겠다는 방향이다. 명나라에 의리를 지키고 공유하였던 중화문화를 보존하자는 존주론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될 의리는 개인윤리이자 국가간에도 지켜야 한다는 당시대인의 세계관의 반영이었다. 또한 중화문화의 담지자였던 명이 멸망한 현실에서 그 유일한 계승자인 조선이야말로 중화라는 조선중화주의는 조선의 자기 정체성 보존논리이자 자부심의 고양을 전제로 하였던 것이다. 18세기 중반 북학운동이 시작되면서 양난의 극복 논리였던 북벌론이나 존주론은 그 사상적 기초였던 성리학과 함께 청산 대상이 되었다. 당시 조선사회는 농업에서 상공업으로 변화하는 시기였고 서학과 서교의 유입으로 우려할만한 파문이 있었다. 청나라가 군사대국에서 문화대국으로 성장하였고 이에 따라 북벌론을 부정한 북학론(청을 배워야 한다)이 부상되었다. 그러나 200여년 동안 국가의 정신적 구심점이 된 이 논리를 하루아침에 폐기할 수 없어 정조는 학자 군주로써 존주론을 역사적으로 정리하고자 존주휘편을 편찬하였고 중화문화 체제의 수호에 공이 있는 사람들은 명의 배신이자 조선의 충신, 열사라 인식되어 그들에 대한 추모 사업을 계속하였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그리고 척화에 입각하여 충의를 세우고 희생되거나 순교한 신하들의 행적을 세밀하게 분류하여 ‘황단배향제신목록’으로 정리하였다. 영조와 정조는 서얼출신들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고 정조대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많은 서얼출신의 북학자들이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정옥자- 조선 후기 역사의 이해
정옥자- 조선 후기 조선 중화사상 연구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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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5.25
  • 저작시기2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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