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및 역사-이승만 대통령 업적 평가(과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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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및 역사-이승만 대통령 업적 평가(과와 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過誤)
1) 자유민주주의 체제 훼손
2) 국가보안법
3) 반민특위 해체와 친일파 문제
4) 반공주의와 북진통일정책
5) 6·25전쟁의 초기 대처

2.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業績)
1) 자유민주주의체제 도입
2) 평화선(平和線) 선언
3) 반공포로석방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4) 농지개혁
5) 기타-교육제도 개혁
Ⅳ. 결론

본문내용

%였던 한국인의 문맹률은 1960년까지 10% 이하 수준으로 낮아졌다.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및 대학(교) 등 각급 학교의 수를 대폭 증설하였다. 그 결과 대학(교)의 예를 들면, 건국 당시 19개에 불과했던 대학(교)의 수가 63개교로, 즉 3.3배 증가하였고, 대학생 수는 7800여 명에서 9만7800여 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고급 인력 양성에 관심을 기울여 청년들의 해외 유학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한국에는 전례 없는 ‘유학 붐’이 일어나 1953~1966년 약 7400명의 젊은이가 해외유학인정시험을 거쳐 해외, 특히 미국으로 유학하였으며, 그 중 약 1500명이 1982년까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상과 같은 ‘교육개혁’조치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에는 일찍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육기적’이 일어났다. 이 때 양산된 고급인력은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었다.
둘째, 문화적인 면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0월에 한글 전용 법안을 공포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한글 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그는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단군 연호를 서력(西曆)과 더불어 병용케 함으로써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한국인의 세계화에 필요한 영어 교육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Ⅳ. 결론
이상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의 공적과 과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승만의 공(功)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도입, 평화선 선언, 반공포로석방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과정에서 보인 외교 모습, 농지개혁, 교육제도 개혁을 언급할 수 있겠다. 그에 반해 이승만의 과(過)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훼손, 국가보안법, 반민특위 해체와 그에 따른 친일파 청산 미해결의 문제, 반공주의와 북진통일정책과 그로 말미암은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 6·25전쟁 중의 대처모습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를 다시 한번 살펴봄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앞잡이였을 뿐이다’, ‘분단의 원흉’이다, ‘독재자이다’ 등의 그간의 인식에 대해서도 다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이 중에서 ‘미국의 앞잡이’는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대한민국 설립 이전, 즉 미군정 시기에는 분명 미국에게 이승만은 미국의 이해관계에 꼭 알맞은 적임자로 생각되었을 것이며,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는 미국의 지지가 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6·25 전쟁 중에서 보인 그의 반공포로석방 등의 문제에서 적어도 그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반(反)하는 행동을 하였으며, 이후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 자리에 다른 인물을 세우려고 하기도 하였다.
내가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한 모습은 이런 것뿐이다. 즉, 나라를 미국에 팔아넘기는 ‘미국의 앞잡이’는 아니었으며, 평화선 선언이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전까지의 과정에서 보인 그의 외교 전략은 탁월하며, 오늘날 정부는 이 모습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앞서 공적으로 언급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도입이나 농지개혁, 교육제도개혁 등은 미군정의 영향 하에 있었던 당시 상황으로서는 필연적인 과정이었으며, 그의 다양한 해외 경험이 바탕이 되었지만 순전히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기엔 어려운 것이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은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 한국 현대사의 시작, 즉 초대 대통령으로서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다. 분단이 된 상황이야, 당시 국제적·국내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것이라 순전히 이승만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후에도 분단 해결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반공주의와 준비도 미흡한 북진정책을 내세워 오히려 전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켰다. 또한, 그의 잇따른 정치적인 행태와 독재정치는 이후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정권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민주주의 발전에도 방해가 되었다. 친일파도 청산하지 않아서 이후에도 친일파 관료들이 득실되는 사회를 만들었다.
지난해 이승만을 두고 건국공신인가 독재자인가를 놓고 그에 대한 재평가 논란이 뜨거웠다. 하지만 앞서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이라고 평가했던 내용은 순전히 정치인으로서 이승만의 개인적인 역량에 의한 공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독창적인 그의 능력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영향이 지대했으며, 실제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하려는 세력은 이승만의 극히 일부분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이승만에 관한 (긍정적인) 평전에서도 대부분은 그의 독립운동 시절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의 큰 실정이 나타나는 6·25전쟁과 이후 정치 행보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그의 집권 후기 독재에 관해서도 이승만의 의지가 아닌 그의 주변 인물들에 의해 눈이 흐려졌다고 핑계를 대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과오 중에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 문제, 국가보안법 논란, 역사 교과서에도 그의 건국 과정의 공적 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당하고 있는 4·19혁명 등 역사에 결정적인 오점을 많이 남긴 대통령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건국 초기에는 많은 시행착오와 희생과 독재가 따른다. 하지만 그 과정을 다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사의 시작\'이란 행보를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했기에 그의 재평가 문제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논란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 로버트 올리버, 박일영 옮김,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 동서문화사, 2008.
- 로버트 올리버, 황정일 옮김, 『신화에 가린 인물-이승만』,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2.
-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해방에서 4월혁명까지』, 역사비평사, 2007.
- 유영익, 『이승만 연구』,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0.
- 이주영,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김&정, 2008.
- 이한우,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 해냄, 2008.
-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 프란체스카 도너 리, 조혜자 옮김,『6·25와 이승만-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
- 유영익,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재평가」, 『역사학보』 제192집, 역사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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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6.11
  • 저작시기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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