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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40년대][문학][문학사][소설][매체][작가][조선민족혁명당][국공합작체제]1940년대 문학, 1940년대 문학사, 1940년대 소설, 1940년대 매체, 1940년대 작가, 1940년대 조선민족혁명당, 1940년대 국공합작체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1940년대의 문학
1. 시
2. 소설
3. 비평
4. 희곡

Ⅱ. 1940년대의 문학사

Ⅲ. 1940년대의 소설
1. 특징
2. 문학사적 의의
3. 주요 작자와 작품
1) 김동리
2) 황순원
3) 김영수(金永壽)
4) 최태응(崔泰應)
5) 곽하신(郭夏信)
6) 안수길(安壽吉)
7) 최인욱(崔仁旭)

Ⅳ. 1940년대의 매체

Ⅴ. 1940년대의 작가
1. 김광균
2. 유치환
3. 신석정
4. 서정주
5. 김상옥
6. 유치환
7. 윤동주
8.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9. 박두진
10. 노천명
11. 김광섭

Ⅵ. 1940년대의 조선민족혁명당

Ⅶ. 1940년대의 국공합작체제

참고문헌

본문내용

따라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고 민혁당은 그 점을 높이 사고 있었다.
연합국에 의한 유럽 망명정부의 승인 → 중국 국민정부에 의한 임시정부 승인 가능성의 대두→ 민혁당의 임정 참여 결정이라는 주장은 당시의 문헌에 의해 일면 보강되는 듯이 보인다. 당시에 작성된 한 자료에 따르면 1941년, 중국 국민정부 외교부장 곽태기가 김구김원봉 등과 만나 임정 승인문제를 거론하면서 양당 즉 민혁당과 한독당의 단결 합작을 희망하였고, 이 같은 곽태기의 말을 듣고 민혁당은 임정 불참가라는 종래 정책을 버렸다고 한다.
郭泰祺의 역할은 金弘壹의 회고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金弘壹의 회고에 의하면 中國 國民政府 駐英大使 郭泰祺가 영국에서 근무할 때 유럽 망명정부들이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망명정부들의 존재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영국정부는 郭泰祺에게 駐中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종용’했다고 한다. 영국 정부는 중국정부가 솔선하여 임정을 승인하고 나면 뒤이어 영미소도 승인할 것이며, 이는 한인들의 항일운동을 고무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후 郭泰祺는 귀국하여 중국 국민정부 외교부장에 취임하자마자 정부 고위층에 건의하여 임정을 승인할 채비를 서둘렀고, 郭泰祺는 중국정부의 그러한 뜻을 임정에 전달했다고 한다.
김홍일 회고에 따르면 이 사실을 알게 된 민혁당 측은 “자기들이 참여하지 않은 임시정부가 연합국에 의하여 승인”될 사태를 크게 우려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민혁당 측에서는 “각 당파가 모두 참가할 때까지” 중국 정부는 임정 승인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Ⅶ. 1940년대의 국공합작체제
국공합작체제는 1940년 봄을 고비로 현저히 흔들렸고 한인 좌파 세력의 정치적 배경이었던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성격은 이때 크게 변화하였다. 1938년 10월 말 武漢을 함락시킨 일본군이 더 이상 대규모 진공을 하지 않게 되자 중일전쟁은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반면 國共 간의 단결 분위기는 그만큼 약화되었고, 역으로 國共간의 갈등은 점차 표면화되었으며, 국민당 내에서는 반공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그런 가운데 국민정부 내의 “反動的 실력자인 何應欽 등”은 國共合作에 편승하여 성장한 경쟁자 陳誠을 추락시켜 나갔다. 陳誠은 그간의 사태에 책임을 지고 1940년 3월 軍事委員會 政治部長 직에서 물러났다. 아마도 중공 세력의 성장과 그에 따른 국민당의 상대적 손실에 대한 책임 때문이었을 것이다. 華北 경우 1939년 하반기에 이곳에서는 국민당계 부대와 공산당계 부대간의 충돌이 있었고 공산당계 군대가 승리하였다. 점차 일본군 점령지를 제외한 華北地區에서 공산당이 거의 석권하게 되었다. 일부 국민당 군 간부는 중공군(팔로군)의 유격전에 대해 “遊而不擊”(遊하면서 擊하지는 않는다)이라 하여 항일에 소극적이라고 비난하였다.
陳誠이 정치부 부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政治部의 분위기는 현저히 바뀌어졌다. 국공합작의 상징으로 출발하였던 정치부에서 이후 副部長 周恩來 및 제3청장 郭沫若을 추방하였으며 정치부는 국민당 일색으로 개조되었다. 이로써 “國共合作의 唯一한 橋頭堡가 상실”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자연 한인 좌파에 대한 정치부의 지지성원의 태도는 그만큼 약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곧 좌파에 대한 타격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韓國光復軍이 건립됨으로써 타격을 받았다. 臺灣 학자 胡春惠에 의하면 “한국독립운동자들의 독립 분위기를 고무시키기 위해서 중국 당국은 마침내 1940년 5월에 중국 영토상에서 한국광복군의 성립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한독당은 蔣介石의 허락에 힘입어 1940년 9월 重慶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출범시켰다. 한독당에 의하면 한국광복군은 임정의 군대이고 國軍이었다. 광복군이 건립됨으로써 좌파 군사 대오 조선의용대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저하되었다. 그만큼 광복군 건립에 대한 좌파 측의 반발도 컸다.
1940년 9월에 발간된 조선의용대 기관지《朝鮮義勇隊》에서 필자 如松은 한국광복군에 대해서 “어디에 軍隊가 있느냐?” “어디에 民衆이 있느냐?” “어디에 武裝이 있느냐?” “어디에 作戰이 있느냐?” “어디에 國軍이라 할 만한 戰鬪歷史가 있느냐?”라고 비난하였다.
勞作『中國 안의 韓國獨立運動』의 저자 胡春惠는 저서 곳곳에서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 국민정부가 한인 당파간의 통일을 위해 대단히 노력했음을 밝히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胡春惠도 중국 허락 하에 탄생한 광복군의 존재로 말미암아 한인 우파(한독당)좌파(민족전선) 양측 사이에 새로운 벽이 생겼고, 그에 따라 양측이 상호 공격을 가하고 대립하는 형세를 초래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상대적 지위 하락으로 끝나지 않았다. 민혁당 등 좌파 단체는 절대적으로도 큰 곤경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 점은 우선 조선의용대 기관지 발행의 중단이라는 현상에서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용대는 1939년 2월부터 매월 2 번 혹은 1 번씩 빠짐없이 기관지를 발간해왔다. 그러나 1941년 1월 1일 第39期를 발간하고는 오랫동안 발간은 중단되었다. 의용대는 정치 선전대였던 만큼 선전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의용대의 선전 대상은 在中 日本軍, 中國 軍과 政 그리고 民, 韓人 民族運動 團體와 海外 僑民, 의용대원 자신 등 다양하였다. 이들을 향한 선전에 있어 기관지는 큰 역할을 하였다. 기관지 발간이 중단되었던 것은 국민정부의 한인 좌파에 대한 자금 지원이 격감했음을 의미한다. 다른 한 자료에 따르면 經費 문제는 조선의용대의 활동에 영향을 주었는데 심지어 대원들의 생활 유지도 어려웠다고 한다. 그 정도로 국민당 측의 자금 지원이 격감된 것이다.
참고문헌
김종건(1998), 1940년대 전반기 소설의 작가의식, 우리말글학회
문효치(2006), 1940년대 민족문학사의 새로운 지평, 한국시문학회
서승희(2010), 1940년대 국민문학과 좌담회의 문화정치, 한국현대소설학회
양영석(1989), 1940년대 조선민족혁명당의 활동, 문화체육관광부
이승우(1993), 제2차 국공합작의 성립 배경, 영남대학교
장성규(2009), 1940년대 전반기 한국어 소설 연구, 국제어문학회

키워드

1940년대,   1940년,   문학,   문학사,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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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0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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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56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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