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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로자의식(노동자의식)과 의식조사, 사회의식, 근로자의식(노동자의식)과 기독교관, 근로자의식(노동자의식)과 자동차산업근로자, 근로자의식(노동자의식) 비정규 미조직근로자, 근로자의식(노동자의식) 여성근로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근로자의식(노동자의식)과 의식조사

Ⅲ. 근로자의식(노동자의식)과 사회의식
1. 상대적 박탈감
2. 가족의식, 운명공동체 의식
3. 노사관계의 주요 쟁점

Ⅳ. 근로자의식(노동자의식)과 기독교관

Ⅴ. 근로자의식(노동자의식)과 자동차산업근로자
1. 완성차업체와 부품업체 사용자의 관계
2. 부품업체 노사관계
3. 완성차와 부품 노동자간의 관계

Ⅵ. 근로자의식(노동자의식)과 비정규 미조직근로자

Ⅶ. 근로자의식(노동자의식)과 여성근로자
1. 고난의 원인이자 배경으로서의 가족
2. 가족을 위한 희생

참고문헌

본문내용

엄마도 계시는데 이까짓 아픔 저는 어떠한 곤경과 어려움에도 참기로 하였습니다”(윤명분, 1978)
70년대 전반기의 수기에서 드러나는 특징 중의 하나는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첫 취업경력을 시작한 여성노동자들의 상당수가 ‘식모살이’의 경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노동자들이 식모살이로 첫 취업경력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수기들은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지 않지만 -- 가족적 배경과 노동시장의 조건이 맞물려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가족의 입장에서는 어린 딸들을 식모살이로 보내는 것은 그로 인한 수입을 기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입을 줄이는’ 생존전략이었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거나 갓 졸업한 어린이가 취업할 곳이 달리 거의 없었다는 것도 원인이었다. 그러나 식모살이는 거의 무보수노동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주인집 가족과의 인간관계 등으로 인한 갈등 등이 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공장에 취업할 수 있는 최저연령(15세 전후)에 이르면 식모살이를 그만두고 공장에 취업하는 길을 택했다.
“여러모로 인정 많은 언니였지만 일을 가르치는 것만은 매섭기 짝이 없었다. 저녁상을 치우며 부엌에서 우는 때가 많았고 ... 난 꼭 공장에 들어가 이 집에서 고삐를 풀고 나 혼자 독립하고 싶었다. ... 발표는 오후에 있었다. ... 번호가 나열되어 있었지만 꼭 있어야 할 숙이의 번호는 아무리 찾아봐도 간 곳이 없었다. 하늘은 노랗고 세상이 모두 죽은 모습처럼 시들거렸다. 이대로 언니집에 가서 다시 별수 없는 식모살이를 해야하나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이희숙, 1973)
70년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첫 취업경력을 식모살이로 시작하는 경우가 급격히 드물어지는 것이 수기에도 나타난다. 그 이유는 중학교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최초 취업연령이 15세 전후로 상승하는 것에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어린 여성노동자에 대한 노동시장의 요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공장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2. 가족을 위한 희생
일찍이 정현백(1985)은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기 한 몸을 희생한다는 ‘희생양 의식’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의식들은 특히 이 글이 분석대상으로 하고 있는 ‘모범근로자’ 수기에도 넘쳐난다. 이러한 희생양 의식은 그녀들이 힘든 노동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여러 가지 욕구를 억누르는 억압의 기제가 되었다.
“고생하시는 엄마와 어린 동생들을 생각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일에만 몰두하던 나는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움직이지도 못하겠고 뱃살이 땡기고 다리가 퍼렇게 부어올라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병은 악화되었습니다. 나는 겁이 덜컥 나서 회사에 결근계를 제출하고는 간신히 집에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 그 밤을 엄마와 다정히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고 3일간 결근계를 무시한채 저는 다시 회사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고생하시는 엄마도 계시는데 이까짓 아품 저는 어떠한 곤경과 어려움에도 참기로 하였습니다”(윤명분, 1978)
“남이 먹을 때 안 먹고 입을 때 안 입고 뭐든지 아껴서 집에 계신 아버지 병부터 고치기로 결심했어요.”(신옥자, 1976)
“남들이 멋있는 옷을 맞춰 입을 때 나는 시장에 가서 생활에 간편하고 값싼 옷을 사 입었고 남들이 구두를 사 신을 땐 난 운동화를 사 신어가며 한 푼이라도 아껴서 저축을 했던 것입니다. 남들이 놀 땐 한시라도 일을 하고 남들이 낭비를 할 땐 한 푼이라도 아껴서 저축을 했던 것입니다.(이재선, 1976)
“가난! 가난이 원수다. 이렇게 저주하며 원망을 하면서 나하나 희생하여 전 가족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힘든 일이야 무엇인들 못하랴, 돈을 벌자! 돈을 벌자! 열심히 벌어서 내가 못다한 공부를 동생들에게만은 남부럽지 않게 배우도록 해주자”(윤명분, 1978)
이렇게 자기 몸을 혹사하고, 온갖 욕구를 억제해가며 모은 돈은 가족의 생계비로, 오빠나 동생들의 학비로, 혹은 가족의 생산수단으로 쓰였다. 이러한 여성노동자의 가족에 대한 기여는 일방적인 희생이기는 하였지만, 순종적이기만 하던 이들의 의식과 가족 내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던 이들의 위상을 조금씩이나마 바꾸어 놓기도 했다. 그녀들이 스스로 돈을 벌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가족의 생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함으로써 독립적인 의식을 획득해가고 가족 내에서도 발언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수기들을 통해 읽을 수 있다.
“그 때 어머니가 찾아와 보시고 고생이 너무 가혹하다고 하시며 눈물 지우시던 것을 내가 이어 받아서도 안 될 것이다. 또 재능이 있는 자식에게 최소한의 교육도 시키지 못하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되리라.”(이선희, 1973)
“부모님들은 내가 보내는 돈을 조금씩 저축하여 77년도에 고향에 논 두마지기를 샀다. ... 내 손으로 벌어서 논 네 마지기를 산 셈이다”(김혜숙, 1979)
“76년 초 막내동생이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다고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첫말에 거절을 하시고... 내가 못 다한 공부를 동생에게만은 꼭 시켜보겠다고 마음먹고 ...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을 들을려고도 하시지 않던 아버지께서 나의 말에 감동하시었는지 결국 승낙을 하셨다. ... 여름이 되니 부모님 계시는 방에 비가 세어서... 그러나 부모님은 나에게 말을 못하고 나의 눈치만 살피셨다. ... 집에 갈 때마다 말씀을 드렸더니 76년 가을 드디어 우리 집 지붕에도 스레트가 얹히고 기둥도 바뀌어져서 제법 새집이 되었다.”(이순남, 1980)
참고문헌
김소영(1995), 고용형태 변화에 따른 노동법적 대응, 한국노동연구원
박기남(1988), 여성노동자들의 의식변화 과정에 관한 한 연구, 연세대 석사논문
유해신(1991), 기독교적 노동관과 노동운동, 새로운 지성
윤복중(1995), 자총련(준)의 불공정거래 개선투쟁에 문제 있다, 노동운동, 승리
죌레, 도로테(1987), 사랑과 노동, 한국신학연구소
홍장표(1995), 자동차산업 하도급거래와 기업간 생산성 및 임금격차,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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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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