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의 백색과 조선 백색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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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야나기의 백색과 조선 백색의 미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민예 운동의 형성
3. 비판에서 바라본 야나기
 1)오구마의 비판시각
 2)일본판 오리엔탈리즘
 3)야나기가 바라본 조선의 미
4. 조선의 백색
 1)신화속의 白
 2)유교시대의 白

본문내용

의 옷이 아닌 삼베의 누런 옷이었기 때문이다. 무명옷의 백색은 유학자들의 검박함에 정서적으로 걸맞아, 조선사회에 널리 퍼져 민족의 일상복으로서 자리를 잡아갔으며, 오히려 결혼식, 잔칫집 등의 예복으로 사용할 정도의 보편화된 사랑받던 민족의 색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한말 조산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시선에 비친 조선인의 흰옷이 생동감이나, 쾌활함, 매력적인 감흥, 발랄함 등으로 받아들여진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즉 야나기가 쓰임의 시원을 알지 못한 채 잘못 해석하고 감상 비평한 일부분이 될 수 있다.
이렇듯 한 시대, 시대를 거쳐 분명히 白자의 근원은 변한 것 같지만, 밝음을 의미하고 깨끗함과 청렴을 추구하는 이상세계와 그리고 하늘 민족으로서의 의미는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민예품을 예로 들어 조선에는 여러 종류의 도자기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게 되었고, 도자문화는 각 나라마다의 특징을 갖춘 일본의 화려함, 중국의 장식성, 아니면 조선처럼 소박하고 깨끗한 도자기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새로운 도자기로 자리매김해나갔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의 도자문화에는 백자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물론 이 시대는 신화를 쫓는 것이 아닌 성리학의 정착과 유교의 덕목이 생활 속에 뿌리내리면서 강조된 청렴결백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허나 백색의 무명옷과 백색의 백자 모두 사물의 외양보다는 그 곳에 담긴 본래의 이치를 깨달은 연후에 결백하고 순결한 아름다움을 비로소 알 수 있다는 성리학의 이념이 신화에 나오는 白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그 시대 문인들이 지향하던 백색의 화선지위에 펼쳐진 산수화에 드러난 조상들의 마음에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선인이 된다는 것, 결국 천인이 되는 삶은 지향하는 민족임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白의 도자기를 살펴보면 백색의 도자기엔 청화안료, 철화 안료, 삼채, 오채 등이 들어와 채색 자기가 그 미를 뽐내고, 화려함을 더했지만 18세기에 들어서는 또 다른 변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청나라의 문화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는 데 치중하면서 소박하고 간결한 백자가 꾸준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 도자기의 형태와 장식무늬를 살펴보면, 당시는 영조의 치세아래의 정치적 안정성에 있을 때입니다. 이 시기에는 백색의 달항아리가 등장하였다. 야나기가 말한 타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白의 달항아리는 철없는 아이의 천진함이 아니라 철없는 아이와도 같은 경지에 올라선 대가의 원숙함에 비유된다. 그것은 고도의 정신적인 수양을 비롯한 피나는 단련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며, 다시 그 같은 경지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머물 수 있는 경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달항아리는 白의 신화를 간직한 고대인들의 정신이 유교의 최고조인 조선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조형적으로 완전한 구형이 아니고, 약간 기울이거나 불완전한 부분이 있어 회화에서 주는 여백의 미와 형의 미를 느끼게 하면서도 매우 크면서 아무런 무늬가 없어 시원하면서도 대범하고, 당당한 기백이 옛 고구려의 위풍을 느끼게 해주는 듯하다. 또한 경제적 안정시기의 넉넉한 여유와 실용미를 살린 백자 그대로의 소박한 멋과 서민과 같은 소탈함 또한 묻어져 나오는 것이 가빠른 성장이후에 우리 민족이 본질적인 모습을 찾고자 노력했던 과정 속에서 부각된 시원적인 도자로 한국적인 미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한 용도가 밝혀져 있진 않지만, 일제강점기에 조선항아리를 수집하던 일본인들이 양반가의 뒤주위에 이 달항아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 구전되는 것으로 보아 산수화를 바라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 살고자 했던 선인들이 마음처럼 조상들이 방안에 두고 白色의 달항아리를 보면서 고대를 기억하고, 白色의 무한함 안에서 자신의 근원과 자연합일을 기대 했을 법한 원대한 백자 달항아리, 그리고 야나기가 사랑한 이조 시대의 백자 다완, 즉 민예품들이 슬픔이 아닌 그 시대의 성장과 평안을 고스란히 담고,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일본인의 눈으로 한국 예술을, 형식의 기교로 정신의 격으로 바라봄으로써 생겨난 발견이자 창작으로 한국 예술의 상의 미의식을 일본인의 형의 미의식으로서 바라봄으로써 생겨난 발견이다. 본래의 상과 형은 한데 어우러져 사물의 형상을 이루되, 근본적으로 양자는 서로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강영희『금빛 기쁨의 기억』p206
원경에서는 雅하되 근경에서는 拙한 한국인의 예술을 일본인의 근경의 시선으로 본 까닭에 오직 근경의 졸함만이 눈에 들어온 결과이다. 이로부터 발견된 것이 무기교, 무작위, 무의식의 민예성이며, 그가 항상 얘기하던 조선에 대한 경애의 태도와 폄하의 태도에도 정신을 두어야 할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본제국의 근대적인 우월감을 배경으로 해서 조성예술을 ‘잡기적인 민예’로 내린 폄하의 태도와 조선예술을 일본 구학의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실현한 예술적인 명물로 오린 경애의 태도 모두 조선예술과의 무관성을 알 수 있다.
야나기는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에 누구 보다 밝은 눈을 지닌 사람이었다. 식민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 눈을 가린 덕에 그것을 끝까지 직시하지 못하고 중간에 환상으로 빗나갔을 따름이다.
역사적 시원이나 문헌의 근거 없이 억지로 들이댄 잘못된 이론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시대를 몰 수 있는 미의식을 찾아야한다고 본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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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정,「1930년대 야나기무네요시의 ‘민예’」『일본어문학』,일본어 문학회,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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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이,『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돌베개,2007
권영필 외「근원상징:백색과 난형」『한국고전미학사상의 전개』,1994·
최남선 ,「불감문화론」『신동아』,1972
야나기무네요시, 민병산 옮김『공예문화』,신구문화사,1975
박병선,『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2007
김혜진,『조선민예에 관한 일본학자들의 연구내용고찰 』경희대교육대학원,2005
박미선,『야나기무네요시를 중심으로 한 민예운동에 관한 연구』,홍익대대학원,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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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3.04
  • 저작시기2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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