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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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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민족운동과 청년운동

Ⅲ. 민족운동과 3.1운동
1. 연구 동향
2. 1910년대 국내 민족운동
1) 국외 반일무장단체의 조직과 활동
2) 국내 비밀결사단체의 조직
3) 농민층의 항쟁
4) 노동자의 항쟁
3. 3․1운동의 전개양상과 참가층
1) 민족대표
2)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되면서 계급, 계층 간, 종교단체 간 연대투쟁이 활발
3) 운동이 심화되어 가면서 민중층이 중심이 됨

Ⅳ. 민족운동과 민족실력양성운동
1. 신간회 활동
2. 문맹 퇴치 운동
3. 조선 물산 장려회

Ⅴ. 민족운동과 민족통일운동

Ⅵ. 민족운동과 신간회운동

Ⅶ. 민족운동과 5.18운동

참고문헌

본문내용

조건으로 고조하되 만일 통일에 성의가 없는 자는 운동 선에서 구축할 것”을 결의하였다.
살자회는 6월 15일 제1회 집행위원회를 열고 사상동맹과 중앙협의회에 대의원으로서 정남국과 신준희를 각각 파견하기로 하고, 각 부서별 집행위원을 정하였다. 부서별 집행위원은 서무부에 최평산최형천, 연구부에 송내호강사원송기호, 선전부에 김병규신준희 등이었다. 살자회는 그 집행위원이 김병규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안도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 눈에 띈다.
한편 이른바 배달청년회사건 판결문에 기술된 바에 의하면, 살자회의 창립총회가 6월 15일 미라리 서당에서 열렸으며, 심사위원 5명을 정하여 회원을 엄격히 심사하여 주로 배달청년회 회원을 중심으로 25명의 회원을 선발하였으며, 집행위원으로서 최형천최평산강정태김병규신준희송내호 등 6인으로 정하였다고 한다(송기호가 빠져 있다). 또 창립총회에 이어 오후에 열린 임시총회에서는 농민운동은 소작농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자작농을 포함한 농민대중의 운동이 되어야 하며, 노동운동은 비타협적 정신으로 경제적 해방을 주로 하며, 청년운동은 무산청년운동의 지도적 정신 하에 민족주의 청년운동과 공동 협력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고 한다. 또 소년운동과 청년운동 등에서 맑스주의를 교양해야 한다는 것 등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살자회는 얼마 존속하지 못하고 1926년 11월 15일 정우회 선언 이후 전국적으로 사상단체의 해체가 결의되는 가운데 역시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간회 완도지회 설립은 1927년 8월말에 이루어졌다. 8월 28일 완도 읍내 중학원에서는 신간회 본부 상무간사로 선임된 소안도 출신의 송내호가 취지 설명을 하고 창립을 결의한 뒤 회관 건축 등을 논의하였다고 한다. 이날 창립대회에서 선출된 임원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임원
회장 임재갑, 부회장 곽동식, 서무부총간사 강사원, 재정부총간 박노길, 정문부총간 박한규, 조직선전부총간 신준희, 조사연구부총간 김장렬, 상무간사 서무부, 이흥세, 재정부 김관선, 정문부, 정학균, 조사연구부 송계완, 조직선전부 김병규, 간사 김동섭, 정두실, 박성동, 최형천, 임재현, 임홍기, 김영현, 나봉균, 정동균
여기서 회장을 맡은 임재갑은 신지도 출신(1927년 당시 나이 37세)으로 수의위친계 회원이었으며, 1925년 신지면 대곡리 소재 사립학술강습소 교사로 있으면서 신지면 내의 순회강연단을 조직하여 강연하는 가운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10개월 동안 복역하고 출소한 인물이었다. 신간회 임원 가운데 상당수는 앞서 본 1924년 완도청년연합회 결성 시 임원 등으로 참여한 인물들이었다. 예를 들어 강사원나봉균김장렬임홍기이흥세 등이 그러하였다.
그런데 신간회 완도지회는 이후 특별한 활동 내용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은 그해 10월 소안도의 이른바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인해 송내호를 비롯한 소안도의 주요 인물들이 구속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안도 사회운동가들은 당시 사상단체와 노농단체, 그리고 신간회를 사실상 주도해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대거 검거되었고, 위의 임원 가운데에서도 완도 군내면 출신으로 조직선전부의 총간사를 맡은 신준희와 간사를 맡은 김병규, 그리고 서무부 총간사 강사원(일명 강정태), 일반 간사 최형천 등이 구속 기소되었다. 창립된 지 한 달 만에 불어 닥친 검거선풍은 신간회 완도지회의 활동을 사실상 정지시킨 것으로 보인다.
Ⅶ. 민족운동과 5.18운동
광주는 자기 지향 속에서 이미 역사적인 반동과 대결하는 민족민중적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항쟁의 직접적 계기는 능동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시기에 집권을 노리는 반동의 선택이 보다 규정적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관점으로부터 주어진다. 곧 당시의 상황은 군부의 선택에서 광주가 가장 좋은 목표물로 된 것이다.말하자면 이 시기에 박정희체계의 후계를 노리는 군부세력은 성장하는 민중적 힘에 대한 자기들의 힘의 과시를 새로운 억압체계의 확립을 위한 계기로서 필요로 했고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보수계 세력간의 격렬한 정치투쟁에서 비록 확연한 우세를 견지하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군부에 강력히 저항하는 김대중계와 재야의 연합이 강력한 것이었다. 여기에 역사의 진실은 제대로 밝혀지는 것은 아니지만 민중적 저항에서 강력한 역사적 전통과 새로운 싹을 갖고 역사에 대두하는 강력한 민중적 힘이 응집된 광주를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는 절호의 장소로서 군부가 선택한 것이다. 역사는 오랜 뒤에 그것을 밝힐 것이나 강력한 재야세력의 전라남도 출신에 의한 장악과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면서 오늘의 현실적인 경제적 소외에서 내일에의 원망을 갖고 있는 전라도민의 요구를 그 첫머리로부터 꺾어버리는 것이 새로운 군사독제를 준비하고 민중적 저항을 억압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군부에 의해 상정되었으리라는 것은 당시의 상왕에서 있음직한 일이다.
이에 대해 군부세력의 재집권기도에 저항하는 광주 쪽의 조건 또한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광주의 민중적 상황은 그와 같은 기도에 저항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선배들이 이룩해놓은 역사적 전통위에서 민주주의 조국의 실현을 위한 고매한 이상 속에 민족적 자주와 민주주의를 추구해 왔던 광주학생운동은 역사적인 상황의 전승 속에 시민 아닌 전 도민 속에 자기 요구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학생적 요구는 역사적 사실에서 두려운 것이기는 했으나 산 자에게는 낯익은 것이었다. 이런 상황들이 광주 그리고 호남을 하나로 묶고 내일의 역사 앞에 헌신하는 역사적 상황을 만든 것이다.
참고문헌
- 김영경(2010), 청년운동, 새로운 노동운동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참여연대
- 김정한(2010), 5.18 광주항쟁 이후 사회운동의 이데올로기 변화,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 김희곤(2009), 3·1운동과 민주공화제 수립의 세계사적 의의, 한국근현대사학회
- 이현희(1973), 1920년대초의 민족실력양성운동, 대구사학회
- 정윤재(2010), 신간회운동의 정치적 성격에 관한 일고,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 최경구(1997), 21세기 민족통일운동과 사회복지의 위상, 경기대학교사회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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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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