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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좌파][좌익][중도좌파정부]좌파(좌익)와 중도좌파정부, 좌파(좌익)와 독일 사민당, 좌파(좌익)와 영국 노동당, 좌파(좌익)와 프랑스 사회당, 좌파(좌익)와 이탈리아 좌파민주당, 좌파(좌익)와 조선민족혁명당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좌파(좌익)와 중도좌파정부

Ⅲ. 좌파(좌익)와 독일 사민당

Ⅳ. 좌파(좌익)와 영국 노동당

Ⅴ. 좌파(좌익)와 프랑스 사회당

Ⅵ. 좌파(좌익)와 이탈리아 좌파민주당

Ⅶ. 좌파(좌익)와 조선민족혁명당
1. 제1기(1938년 10월~1940년 봄)
2. 제2기(1940년 봄~1940년 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겹쳤던 것이다.
국공합작체제가 원활하게 유지되는 정세 하에서 민혁당 등 좌파세력은 중국 당국의 강력한 지지 하에서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한인 우파 청년단체 韓國靑年戰地工作隊 대장 羅月煥 등이 1939년 말 華北 진출을 위한 자금 지원을 中國軍事委員會 政治部 측에게 요청하자 정치부는 이 문제 처리를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에 맡겼다.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에서는 韓國靑年戰地工作隊는 먼저 朝鮮義勇隊에 가입해야 한다는 이유로 요청을 거절하였다. 지도위원회는 특히 華北의 한인을 항일전에 동원시킬 단체로는 조선의용대가 “합법적이며 이상적인 단체”라고 주장하였다.
또 당시까지 중국 당국은 우파 한인측의 임정승인 요청이나 군대 건립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西安의 중국군 第34集團軍 司令 胡宗南은 1940년 2월 15일 이전 어느 시점에 蔣介石에게 中國 境內에서 “朝鮮軍”을 창설하자고 건의하였다. 胡宗南은 아울러 한인의 임시정부 건립을 허가하여 한인들로 하여금 광복의식을 갖도록 하며 ‘우리’(국민정부-필자)의 소리를 세계에 알리자고 건의하였다. 胡宗南이 임정 건립의 허락과 조선군 건립을 주장하고 나온 점에서 볼 때 胡宗南의 건의는 1939년 말부터 西安을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고 있던 우파 한인 측의 요청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胡宗南 案을 검토한 中國軍事委員會 政治部는 임정 수뇌 인물 선택이 어렵다거나 한인 당파간의 분열 등의 이유를 들어 임정 건립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또 한인의 淪陷區(화북 일본군 후방지역-필자)와 東北 파견은 현재 정치부가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여 전선공작에 배치하고 있는데 이 의용대를 강화해 그 공작을 담당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선군 건립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이처럼 안정된 위치에 있었을 때 민혁당을 비롯한 좌파는 임정에 가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점은 關內地方 좌우 7개 당파가 모여 개최한 江統一會議에서 알 수 있다. 민혁당은 江統一會議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임정으로의 통일에는 반대하였다. 1939년 8~9월 江會議 때 우파측에서는 “임시정부는 3.1운동 때 상해에서의 전국대표자대회에 의해 구성되어 혁명 역사상의 의의”가 있고 “국내 동포와 해외동포들이 이 조직을 잘 알고 적극 옹호”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임정을 민족 최고 영도기구로 해야 하며, 아울러 조선의용대는 임정의 통솔아래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민혁당은 임정 봉대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강만길 교수에 따르면 임시정부를 奉戴하느냐 여부는 江會議가 실패로 끝난 3가지 요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2. 제2기(1940년 봄~1940년 말)
國共合作體制는 1940년 봄을 고비로 현저히 흔들렸고 한인 좌파 세력의 정치적 배경이었던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성격은 이때 크게 변화하였다. 1938년 10월 말 武漢을 함락시킨 일본군이 더 이상 대규모 진공을 하지 않게 되자 중일전쟁은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반면 國共 간의 단결 분위기는 그만큼 약화되었고, 역으로 國共간의 갈등은 점차 표면화되었으며, 국민당 내에서는 반공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그런 가운데 국민정부 내의 “反動的 실력자인 何應欽 등”은 國共合作에 편승하여 성장한 경쟁자 陳誠을 추락시켜 나갔다. 陳誠은 그간의 사태에 책임을 지고 1940년 3월 軍事委員會 政治部長 직에서 물러났다. 아마도 중공 세력의 성장과 그에 따른 국민당의 상대적 손실에 대한 책임 때문이었을 것이다. 華北 경우 1939년 하반기에 이곳에서는 국민당계 부대와 공산당계 부대간의 충돌이 있었고 공산당계 군대가 승리하였다. 점차 일본군 점령지를 제외한 華北地區에서 공산당이 거의 석권하게 되었다. 일부 국민당 군 간부는 중공군(팔로군)의 유격전에 대해 “遊而不擊”(遊하면서 擊하지는 않는다)이라 하여 항일에 소극적이라고 비난하였다.
陳誠이 정치부 부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政治部의 분위기는 현저히 바뀌어졌다. 국공합작의 상징으로 출발하였던 정치부에서 이후 副部長 周恩來 및 제3청장 郭沫若을 추방하였으며 정치부는 국민당 일색으로 개조되었다. 이로써 “國共合作의 唯一한 橋頭堡가 상실”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자연 한인 좌파에 대한 정치부의 지지성원의 태도는 그만큼 약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곧 좌파에 대한 타격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韓國光復軍이 건립됨으로써 타격을 받았다. 臺灣 학자 胡春惠에 의하면 “한국독립운동자들의 독립 분위기를 고무시키기 위해서 중국 당국은 마침내 1940년 5월에 중국 영토상에서 한국광복군의 성립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한독당은 蔣介石의 허락에 힘입어 1940년 9월 重慶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출범시켰다. 한독당에 의하면 한국광복군은 임정의 군대이고 國軍이었다. 광복군이 건립됨으로써 좌파 군사 대오 조선의용대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저하되었다. 그만큼 광복군 건립에 대한 좌파 측의 반발도 컸다.
1940년 9월에 발간된 조선의용대 기관지《朝鮮義勇隊》에서 필자 如松은 한국광복군에 대해서 “어디에 軍隊가 있느냐?” “어디에 民衆이 있느냐?” “어디에 武裝이 있느냐?” “어디에 作戰이 있느냐?” “어디에 國軍이라 할 만한 戰鬪歷史가 있느냐?”라고 비난하였다.
勞作『中國 안의 韓國獨立運動』의 저자 胡春惠는 저서 곳곳에서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 국민정부가 한인 당파간의 통일을 위해 대단히 노력했음을 밝히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胡春惠도 중국 허락하에 탄생한 광복군의 존재로 말미암아 한인 우파(한독당)좌파(민족전선) 양측 사이에 새로운 벽이 생겼고, 그에 따라 양측이 상호 공격을 가하고 대립하는 형세를 초래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참고문헌
박영호 외 - 유럽 사민당의 경제정책과 제3의 길 - 독일, 프랑스, 스웨덴을 중심으로, 동향과 전망 통권54호, 2004
박성조 - 좌파 우파간의 갈등을 넘어, 법문사, 2005
박노자, 지승호 - 좌파하라(박노자 처음으로 말 걸다), 꾸리에, 2012
앤서니 기든스 저, 김현옥 역 -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한울, 2008
유동열 - 한국좌파운동 현황분석, 자유민주연구학회, 2010
H. 펠링 저, 최재희·염운옥 역 - 영국 노동당의 기원, 지평문화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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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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