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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기 남인학파, 남인학파, 역사인식, 중국관, 조선후기실학, 성호 이익]근기 남인학파의 역사인식, 근기 남인학파의 중국관, 근기 남인학파와 조선후기실학, 근기 남인학파와 성호 이익 분석(근기 남인학파,중국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근기 남인학파의 역사인식
1. 성호 이익(李瀷 1681~1763)
2.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 ~1791)

Ⅲ. 근기 남인학파의 중국관

Ⅳ. 근기 남인학파와 조선후기실학
1. 조선후기 실학
2. 실학의 성격과 역사학에 끼친 영향

Ⅴ. 근기 남인학파와 성호 이익

참고문헌

본문내용

며, 그에 따라 직업의 개념이 강조되었다.
네 번째로, 실학은 실증주의적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에 자연과학 및 기술이 있다. 근대 지향적인 요소를 찾아볼 가능성은 여기에도 많이 내포되어 있다. 실학사상 형성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서학의 수용이다. 역산 천문서, 지리서, 과학서, 종교서적 등의 서학서는 이익의 열린 실학정신과 연구를 통해서 종래 호기적 차원에 머물던 서학에 대한 관심을 하나의 학문적 인식으로 발전 시켰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조선 서학’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역사의식과 관련하여 서양의 지리학과 천문학은 큰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 문화의식을 탈피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역사의식도 심화하여 중국과 구별되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독자성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올바를 역사서술과 역사이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였다. 성호 이익은 <독사료성패>에서 “옛날 사서를 두루 살피고 여러 서적을 방증하며 이리저리 참작하고 비교해야지 실로 오로지 한 책만 믿고서 단정해서는 안된다. 옛날 정자는 사서를 읽다가 반쯤에 이르면 문득 책을 덮고 깊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성패를 헤아려본 다음에야 다시 읽었으며, 맞지 않는 곳이 있으면 다시 깊이 생각하였다 한다.”라고 하였다. 즉 객관적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한두 사서에 의존하지 말고 여러 서적을 보되 상호 비교해 보아야 하며, 성패를 뒤집어 생각해 논리적으로 추론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실학의 기본 특성인 실증주의의 영향으로 문헌 실증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실학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는 민족의식이다. 종래의 정통 성리학의 세계질서관은 화이론적 세계관이었다. 이는 세계는 화와 이로 갈라지고, 화만이 문화가치이고 이는 야만이었다. 화의 핵심은 세계의 지리적 중심이기도 한 중화로서 중국민족의 배타적 독점물이다.
조선은 그 축소판모조판으로서의 소화이다. 이런 가치 질서 속에서 조선의 성리학자와 양반유생은 중화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거나, 그 밖의 이에 대해서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실학은 이런 화이론적 세계관에 대한 부정이었다. 먼저 화와 이의 구별을 부정하고 조선은 화자체로 존숭되었다. 그리고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다.
또한 실학에서는 각 민족의 풍속과 문화의 개성, 국가의 독자성을 확인함으로써, 세계는 개별 민족국가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으로 인식되어 조선이 개성적독자적인 민족국가로 인식되었다. 이런 민족적 자각으로 자기를 알아야겠다는 의식이 팽배해졌으며 이런 의식의 표현이 실학에서의 조선에 대한 연구열이었고 그 대표자가 바로 이익과 안정복이었다.
Ⅴ. 근기 남인학파와 성호 이익
이 시기에 이르면 이익의 내재적인 세계관은 나름대로 확고하게 정립되고, 이러한 준비된 학문을 바탕으로 서구문물도 보다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면 道東錄이 완성됨과 동시에 40여년의 長老年期의 사상을 담은 星湖僿說이라는 백과전서의 완성을 보게되는 것이다. 이 책은 이익 자신이 밝힌 바대로 1761년에 40년 전이라 하였으므로 1720년대부터 집필에 들어갔음을 읽을 수 있다. 이 두 저서는 그의 문인 安鼎福과 尹東奎에 의하여 전자는 1752년 李子粹語로 책명이 바뀌고, 후자는 이익의 일생을 가늠하는 잣대로 규정짓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저술로서 그의 당대의 백과전서의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인데 문인 安鼎福에 의하여 星湖僿說類選으로 재정리되어 출간되기에 이른다. 이는 그의 문인과의 강학과 학문적인 교유를 통한 그의 학문과 사상의 성장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입장에 있었던 安鼎福과 尹東奎에 의하여 대부분 그의 논저가 정리됨으로써 그가 이뤄 놓은 본래의 의도 보다는 다소 퇴색되어간 측면이 없지는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측면을 고찰할 수 있는 기록이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그의 전반기에 완성한 四七新編의 내용의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개정의 움직임이 결국은 또 다시 尹東奎와 安鼎福과 같은 보수적인 입장에 있었던 견해가 끝까지 반영되고, 愼後聃李秉休權哲身李基讓 등과 같은 진보적인 입장에 있었던 그들의 사상을 대변하지 못하기에 이른다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을 감안하여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엄정한 위치로 다시 이들과 구별짓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의 내재적인 학문 수준에다가 서구문물의 선각적인 이해의 힘은 그와 교유하는 문인과의 강학에서 그 위치를 확인받는 동시에 그의 학문자체도 그만큼 더 발전하였던 것이다. 특히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당시 근기남인 가운데 어느 학자들 보다 뒤지지 않은 서구문물에 대한 지식의 先習得에 의한 세계관의 확대이었다. 그의 서학관은 이 시기에 오면 다음과 같이 세계관의 확대로 이어짐을 볼 수 있다.
“지구 아래 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말은 서양 사람들에 의하여 비로소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익은 이어 중국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자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西域에 大流沙가 있는데, 이는 중국 북쪽에 있는 사막은 문제가 아닐 정도로 크고 서양의 천문학은 중국으로는 따를 수 없고, 서양이 첫째이며, 回回가 그 다음이라고 하여 천문학에 대하여도 서양의 천체관의 우수성을 인정, 중국 중심의 지식 追究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사고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조건은 바로 여기에 있었으며, 그것은 사문과의 지식의 교류 또는 문인들과의 강학에서도 드러나고 있음을 앞에서도 일부 언급하였다.
참고문헌
◇ 강병수, 조선후기 근기남인의 대중국관 연구, 국사편찬위원회, 1999
◇ 부유섭, 17-18세기 중반 근기남인 문단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백도근, 근기남인 실학파 예학관 연구 : 성호학의 실학성과 그 예학, 새한철학회, 2005
◇ 신항수, 17세기 후반 영남 남인학파의 경세론, 고려대학교, 1993
◇ 서근식, 근기남인으로서의 성호 이익의 역학사상, 한국철학사연구회, 2011
◇ 이대근, 조선후기 근기남인의 서학수용에 관한 연구 : 천주관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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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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