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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불교, 불교 유아관, 불교 인간관, 불교 사생관, 불교 죽음관, 불교 종단관, 불교 해탈관, 유아관, 인간관, 사생관]불교의 유아관, 불교의 인간관, 불교의 사생관, 불교의 죽음관, 불교의 종단관, 불교의 해탈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불교의 유아관
1. 수태의 순간을 곧 인간의 초기 형태로 보는 태내관(胎內觀)
2. 보호와 교도의 존재로서의 유아
3.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의지를 지닌 존재로서의 유아

Ⅱ. 불교의 인간관

Ⅲ. 불교의 사생관

Ⅳ. 불교의 죽음관

Ⅴ. 불교의 종단관
1. 종단 운영 복지기관 종사자들은 먼저 한국불교와 조계종단의 역사와 전통에 대하여 무한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2. 복지기관 종사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 즉, 연기적 세계관과 인과의 가치관을 내면화하여 복지사로서 불제자로서 확고한 신념과 자세를 정립하여야 한다
3. 한국불교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종교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Ⅵ. 불교의 해탈관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
第 7識의 활동에 따라서 나머지 6識도 작용을 하게 된다. 5識은 오직 감각기관에 현존하는 대상들만을 아무런 사유나 분별없이 지각하는데 비하여, 第 6識인 意識은 정신적 현상들뿐만 아니라 5識을 통해 주어지는 대상들에 대해서도 분별을 한다. 그 뿐 아니라 意識은 현존하지 않는 대상까지도 관여 할 수 있다. 즉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고 회상하기도 하며 아무런 대상이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識의 작용에 의해 세계가 형성된다. 이 識의 작용은 역순으로도 작용된다. 즉 전5識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은 제 6識에 의해 통일되어 분별되고 말나식은 여기에 집착을 하게 한다. 이 결과의 산물은 아뢰야식에 종자의 형태로 저장되는 것이다.
이러한 識의 상호관계를 보면, 識 자체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존관계에 놓여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인연작용에 의해 발생된다는 것을 識이 깨닫는 순간 모든 집착과 미망으로부터 해방되며 그의 인격의 심층, 즉 아뢰야식 내에서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즉 아뢰야식에 있는 유루종자는 무루의 종자로 바뀌게 되며 번뇌가 소멸되어 해탈을 증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의존적인 관계를 망각하고 홀로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집착하는 작용이 바로 말나식이다. 이 집착의 결과물은 아뢰야식 내에 종자의 형태로 저장되어 다시 새로운 집착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원인을 만든다. 이렇게 반복되는 과정이 바로 집착의 세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종자의 완전한 소멸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이것은 識이 집착의 활동을 멈추는 것이다. 집착의 작용이 감소됨에 따라 識 안에 쌓여있던 유루종자는 무루종자로 바뀌게 되고 무루종자는 더 이상 욕망을 키우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나라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게 되고 나의 것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원성실성이다.
이러한 三自性의 관계를 唯識三十頌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의타기자성이 변계소집자성을 멀리 여읜 것이 원성실자성이다.”
의타기자성이 변계소집자성에 의해 존재적 내지 인식적으로 속박되고 가치적으로 오염된다. 存在的 속박은 潛在的으로는 아뢰야식에 내재하는 유루종자이고 顯在的으로는 몸과 마음의 부자유성이다. 認識的 속박이란 마음이 주관(見分)과 객관(相分)으로 대립함으로써 속박된다. 이런 속박에 의해 윤회하는 존재가 인간존재라고 한다. 이것을 삼자성으로 말하면 의타기자성이 변계소집자성을 갖는 것이다. 변계소집자성을 제거할 때, 즉 의타기자성이 청정하게 될 때, 그것이 그대로 원성실자성이다.
唯識에서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원성실을 사용한 이유는 요가실천을 통해서 진리의 완성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진리는 단순히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한 단계씩 접근해 가야하는 실천적 목표였다. 그 과정에서 진리는 조금씩 보여진다. 見道에서 眞如에 통달한다. 그리고 修道에서 마음의 때가 조금씩 제거되어 최후에는 티끌 하나 없이 닦여진 마음에 진여가 완전한 모습으로 빛을 발하며 나타난다. 진리는 자기 자신이 직접 체득하고 완성해야 하는 구체적인 사실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말나식의 어떤 작용에 의해 미망의 세계가 성립되는가?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말나식의 작용은 4번뇌와 함께 진행된다. 아뢰야식에 대해 집착하고 나라고 착각하여(我執), 마음 위에 떠오르는 것들이 인연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것을 망각하고 이를 집착한다. 즉 마음의 진여성을 망각하고 나라고 집착하는 아집이다. 또한 사고의 구성물에 대해 이것이 실재한다고 집착을 하게 된다(法執). 이러한 아집과 법집이 없는 경지가 무아이며 이 무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수행이 필요하다.
마음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前 五識의 오염을 없애고 그 다음은 意識이다. 그리고 가장 최후에는 말나식의 아집과 법집이 없어지며 이와 더불어 4번뇌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를 성불의 견지라 하고 견성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심을 말나식이라 하고 말나식에 번뇌가 있는 한 범부이며, 반대로 말나식의 번뇌가 다 소멸되었다면 성불의 견지로서 無碍 自在한 경지가 되며 동시에 무한한 진여의 경지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도식화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煩惱障을 끊는다 - 心解脫을 얻는다
二空眞如를 바르게 이해 한다┩
┖ 所知障을 끊는다 - 慧解脫를 얻는다
二空眞如는 두 가지 空 즉 人無我와 法無我를 말한다. 즉 자아(我, tman)가 실재한다고 보는 我執과 사물(法, dharma)이 실재한다고 보는 法執을 없앤 곳에 나타나는 진리이다. 이것이 唯識에서 말하는 자기를 포함하는 우주전체의 참모습이다. 이 우주의 참모습을 덮은 것이 아집과 법집 이라는 내적인 마음의 오염인 것이다.
아집에 의해 煩惱障이 생기고 法執에 의해 所知障이 생긴다. 이 두 가지 장애 때문에 생사윤회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煩惱障은 심신을 교란시켜 열반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마음의 오염(煩惱)으로서 “자아가 실재한다”고 보는 我執에서 비롯된다. 所知障은 業을 일으켜 三界(迷)의 세계로 나가게 하는 작용은 없지만, 알아야할 대상을 덮어서 바른 지혜가 생기는 것을 방해하는 지적인 마음의 오염으로서 “외계사물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法執에서 생긴다. 그리고 번뇌장이 원동력이 되어서 생사의 바다를 표류하며, 소지장의 세력 때문에 我執과 法執에 의해 煩惱障과 所知障이 생겨 迷惑의 세계 속을 윤회하는 것이다. 이 번뇌의 소멸은 번뇌를 발생시키는 작용이 정지됨으로써 가능하다. 즉 말나식 작용의 정지에 의해 識의 질적인 변환이 이루어져 잡염의 상태에서 청정의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 이 識의 질적 변환은 바로 遍計所執性이 圓成實性으로 됨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 김종인, 중생 개념에 투영된 불교의 인간관, 동양철학연구회, 2006
◈ 박부영, 법인당 벽안 대종사의 생애와 종단관, 대한불교 조계종, 2011
◈ 서상준, 불교의 죽음관, 동아대학교, 2009
◈ 안환기, 유식불교의 해탈관, 한국종교학회, 2001
◈ 윤종갑, 불교의 사생관과 생명윤리, 대한철학회, 2008
◈ 장경도, 동양의 유아관에 대한 비교고찰 : 유교와 불교의 유아관을 중심으로, 원광대학교,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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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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