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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선(禪), 선(禪) 의미, 선(禪) 분류, 선(禪) 특징, 선(禪) 기원, 선 갈래, 선 역사적 전개]선(禪)의 의미, 선(禪)의 분류, 선(禪)의 특징, 선(禪)의 기원, 선(禪)의 갈래, 선(禪)의 역사적 전개, 선(禪)의 방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선(禪)의 의미와 분류

Ⅲ. 선(禪)의 특징

Ⅳ. 선(禪)의 기원

Ⅴ. 선(禪)의 갈래

Ⅵ. 선(禪)의 역사적 전개
1. 불타의 선
2. 달마의 선

Ⅶ. 선(禪)의 방법
1. 임제선은 선은 깨달음이 중심인데 깨달음이란 적정한 심적상태도 아니고 정신활동의 정지도 아니다
2. 조동종에서는 지관타좌의 간화선은 대오지선이라고 비난한다
3. 단전주선은 우리 몸에 있는 단전에 주하는 선법이다
4. 무시선은 도와 내가 하나가 되는 선을 말한다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慧와는 다르다.
선을 하면서 公案을 드는 것이 임제의 전통인데 大慧는 打坐는 無動이나 심중에 回轉이 있어야 지금과 다른 세계를 맛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간화선은 공안발생 이전에는 성품, 이것이 무엇일까 하는 탐구심에서 깨닫게 된다고 한다. 선적 의식의 성숙에는 예비적인 지적행장과 자기를 초탈하려는 강렬한 원력, 그리고 스승의 인도가 필요하다. 이를 통하여 不知의 미혹에서 돌출하는 깨달음이 된다는 것이다. 探求- 工夫- 成熟- 爆破의 이러한 경험을 지나서 깨닫게 된다고 임제종에서는 주장한다. 정신력의 통합이 최고절정에 달하면 無記的 의식상태가 된다. 이는 황홀지경과 다르다. 황홀은 수동적 관조의 결과이며 심적능력의 정지를 의미한다. 선의식은 인격구성의 근본능력이 치열한 행동을 할 때 현전하는 의식상태인 것이다.(慧能曰勿迷言定慧別)
2. 조동종에서는 지관타좌의 간화선은 대오지선이라고 비난한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은 진실한 달마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묵조파라 한다. 석가의 마갈타국에서 3.7일 동안 室에서 不稱聲을 한 것이나 달마가 소림사에서 9년 면벽한 것이나 유마의 無言이 모두 그러하다는 것이다.
3. 단전주선은 우리 몸에 있는 단전에 주하는 선법이다
배꼽은 사람의 중심에 있다. 사람이 뱃속에 있을 때 영양공급과 호흡을 하던 곳이다. 여기에 힘을 얻으면 우주의 힘을 얻으며 중심이 잡힌다. 마음이 맑아지면 변동이 생긴다. 수승화강법으로 정신을 맑게 하면 심경이 변화가 생기며 그 만큼 悟의 경지에 도달하기 쉽다. 툭 깨닫기만 기다려도 안되는 것이요, 깨닫는 것을 비난해도 안되는 것이다. 정신이 맑아지고 통일되면 점차 자꾸 깨닫는 것이요, 크게 깨닫는 것이다.
4. 무시선은 도와 내가 하나가 되는 선을 말한다
도를 객관적으로 놓고 보는 사람, 도와 나를 별개로 알고 그 도를 보며 도를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때로는 그러한 恬淡外道가 참 종교인이요 구도자로 생각하기 쉽고 또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또 이것을 俗情으로 생각하면 恬淡한 모습으로 비치기 쉽고, 또 그 일이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를 즐겨하는 것 보다 번뇌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욕망이 강하기 때문에 그 번뇌적 욕망에 살지 않는 그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도라는 것은 결코 비인생적 반인생적인 것이 아니다. 도가 도인 소이는 천지와 더불어 번영하기 때문이다. 생생발전하는 것이 도가 도되는 소이이지 인생에서 이탈하는 도는 아무리 고상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결국은 魔道인 것이다.
사람들은 머리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머리가 과연 나인가? 사실 머리는 참 나가 아니다. 참 나는 사실은 超個的 生命, 우주에 꽉 차 있는 생명이다.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은 본래 청정한 것인데 욕심 때문에 흐려졌다. 요는 마음을 깨끗이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병도 낫고 가정도 평화가 되고 세계도 평화가 된다. 증애 · 사념 · 망상이 없고 순수한 인간성 본래의 경지, 타고난 대로의 청정심이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신을 보는 것이다. 선불교에서의 공안을 참구하는 것은 이 청청심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육조대사는 무식했고, 승려로서의 생활도 안했으나 순수한 인간성을 회복했기 때문에, 오직 마음하나가 순수했기 때문에 육조가 되었다. 육조대사는 머리도 기르고 승복을 입지 않고 간경·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아만 찧었다. 순수한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형식이나 교단이나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공안에 ‘日日是好日’이라는 말이 있다. 나날이 좋은 날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을 유쾌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이상은 숭산이 분류한 네 가지 선법에 대한 해설이다. 그러나 단순한 해설이 아닌 숭산의 선사상이 포함되어 있는 해설이다. 숭산의 선사상은 우선적으로 간화선이나 묵조선이 아닌 단전주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는 단전주의 필요에 대하여 깊이 천착하여 정전에 나와 있는 ‘단전주의 필요’에 더 깊은 요항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선사상은 결론적으로 무시선으로 귀결하며 그 무시선은 현실을 떠나지 않으며 현실 속에서 참된 삶을 영위함을 골자로 하고 있다. 무시선은 삼학병진의 선이다. 그래서 숭산은 결론적으로 “삼학을 겸전해서 차츰 깨달아 나가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은 어디까지나 수양공부이나 삼학의 공부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약의 六味蕩과 비유하여 삼학팔조동정일여처처불상사사불공무시선무처선의 여섯 가지로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Ⅷ. 결론
禪은 행위요 생활이며 평소의 경험 그 자체이다.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일상의 행동거지다. 이를 일러 평상시의 마음가짐이 곧 도(平常心是道) 라 하고, 또는 언제나 좋은 날(日日是好日) 이 라고도 한다. 우리 인간도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생활해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구나 다 현실에 직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는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는 법(法)을 담는 그릇이다. 도(道)로 나아가는 문이라고 혜원 스님이 말했듯이, 인간들에게 닥쳐오는 일상적 다반사가 그대로 지나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는 반드시 禪이 대두 된다는 것이다.
또한 禪은 도원선사(道元禪師)의 말대로 물고기가 자유롭게 노는데 물고기와 닮고, 유유히 나는 새들에게서 새와 함께 하는데 있는 것인데 이를 사상적으로 말하려면 禪은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지적으로 말하면 禪은 무지(無知)의 지(知)요, 무분별(無分別)의 분별이며, 行쪽으로 말하면 無行의 行이요, 無作의 作이다.
참고문헌
◎ 우정상, 불교와 선, 법무부, 1963
◎ 임태수, 동양의 종교에서 기독교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 유교의 효와 불교의선, 민중신학연구소, 2002
◎ 원담, 선과 불교수행, 여성불교회, 1988
◎ 전재강, 학명의 불교 가사에 나타난 선의 성격과 표현 방식, 한국어문학회, 2010
◎ 최욱성, 불교의 선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1970
◎ 한기두, 선과 불교의 현대화방향, 원광대학교종교문제연구소,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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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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