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식민지시대]일제하(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유기체적 연대론, 동화주의, 일제하(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금융조합령, 노동운동, 일제하(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민족해방운동, 일본인지주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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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하, 식민지시대]일제하(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유기체적 연대론, 동화주의, 일제하(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금융조합령, 노동운동, 일제하(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민족해방운동, 일본인지주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일제하(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유기체적 연대론
1. 유기체적연대론의 의미
2. 개인과 사회의 관계설정
3. 민족에 대한 인식
4. 국가에 대한 인식

Ⅱ. 일제하(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동화주의

Ⅲ. 일제하(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금융조합령

Ⅳ. 일제하(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노동운동

Ⅴ. 일제하(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민족해방운동

Ⅵ. 일제하(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일본인지주

참고문헌

본문내용

나 1925년 5월 12일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에 치안유지법을 시행하여 한국 민중의 정치·사상 운동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그 결과로 1차 조선공산당은 11월 27일 신의주에서 ‘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사업보고’라는 비밀문서가 그곳 경찰에게 폭로됨에 따라 대부분의 간부(약100여명)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검거, 기소되었고 조공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얼마 후 역시 화요파계 인물을 중심으로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하는 제 2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순종의 장의가 행해지는 기회를 이용하여 6·10 만세운동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또한 조선총독부에 덜미가 잡혀 공산당원 및 그 동조자를 포함 135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검거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공산주의 세력의 건재를 과시하듯이 3차 조선 공산당이 재결성되었고, 이 때는 일제의 탄압으로 김철수, 안광연, 김준연, 김세연등 그 책임비서를 빈번히 바꿔가면서까지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조선노농총동맹을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하고 조선청년총동맹을 재편·강화하였고 파벌간 분파투쟁을 청산하기 위해 조선사회단체 중앙협의회를 해체시켰다. 또한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와 여성운동의 통일체로서의 근우회를 지도하며 기관지등의 발행에 힘썼다. 그 뿐 아니라 전국에 지방지부를 조직하고 해외에 본부를 설치하여 활동의 범위를 넓혔다.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한 3차 공산당은 화요파계 간부들의 대대적인 검거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파벌의 구분없이 다양한 출신의 구성원들이 참가해 조직되었다는 점에서 통일공산당이라 불렸다. 그러나 분파 투쟁의 청산을 위해 노력하였던 3차 조공도 뒷날 이 당의 중앙간부들은 M·L파라 하는 새로운 분파를 형성함으로써 여전히 분파 투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번에도 조선총독부에 의한 3차 검거사건으로 100여명이 검거되었고 조공의 영향하에 있던 많은 조직(조선노동총동맹, 신간회, 근우회 등...)의 활동이 정체되었다. 1928년 3월에는 제 4차 조선공산당이 차금봉을 책임비서로 하는 새로운 중앙기구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도 동년 7월부터 행해진 제 4차 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170여명이 검거되기에 이르러 전면적인 파괴 국면을 맞게 된다. 결국 이들 검거 사건으로 인하여, 구체적으로 1,2차 검거시는 화요파가, 3,4차 검거시는 ML파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반면, 3대 분파 중 하나로 여겨지는 서울파도 1927년 서울에서 신조선공산당을 자체적으로 조직하여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한 많은 노력을 했지만 역시 다음해에 구성원 대부분이 검거되고 말았다.
이상으로 1925년 4월에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이 창립된 후 1928년 가을경까지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의해 거의 파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고 말았던 요인 중 하나는 끊임없이 문제시되어 왔던 분파투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 세력을 하나로 결집시키지 못하고 내부적인 대립을 일으키게 함으로 일제에 대항할 힘을 약화시키고 만 결과를 낳았다.
Ⅵ. 일제하(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일본인지주
일본인 지주의 식민지 농장경영은 식민모국 일본의 전체 경영에 어떠한 의의를 가지는가. 일본에 토지기반을 둔 溝手家, 西服部家, 細川家 세 가지 사례를 통하여 보기로 한다.
먼저 溝手家에 대해서이다. 溝手家는 1910년 식민지 조선에 진출하였지만 본가로 송금이 가능한 것은 8년이 지난 1918년부터이다. 溝手家의 총 수입은 소작료 수입(賣米수입), 유가증권에 의한 배당이자, 조선농장 송금 수입, 잡수입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농장 송금 수입이 溝手家 本家의 총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30년까지는 10%이하, 그 이후는 약 14-5%를 차지하고 있다. 溝手家는 1910년대에 나타난 일본 내 토지경영의 불안정에 대응하여 조선 토지경영에 의한 소작료 수입보다는 일본 내 유가증권투자에 의한 배당이자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西服部家 朝永土地株式會社의 주식배당금은 1927-31년 5푼배당이 경제공황에 들어감에 따라 3푼으로 떨어졌으나 경영을 회복한 1935년에는 5푼으로 다시 증가해 1936년부터 6푼 배당으로 되었다. 당기순이익도 매년 증가하여 西服部家는 조선에서 상당히 순조로운 건전경영을 해 나갔음을 볼 수 있다.
西服部家의 조선경영수입이 전체 본가 경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20년대에는 약 20-30%, 경제공황기에는 40%-44%를 차지하여 출자배당금을 능가하는 제1의 수입원이 될 정도로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1935년 이후 35%전후로 떨어지며 1940년 이후가 되면 20%로 낮아졌다(大石嘉一郞 1985: 628-629).
西服部家의 조선경영은 일본 내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소작쟁의의 발생에 대응하여 조선경영에 진출하여 수익을 확대하는 발판을 제공하여 경제공황기에 지주경영의 위기를 넘기는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식민지 조선에 2,000정보를 소유한 거대지주였던 細川家의 경우를 보기로 한다. 조선농장의 세입은 細川家 기본재산의 전체 세입 가운데 30-40%를 차지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조선수입이 일본내 熊本地所部의 수입을 능가하여 細川家의 자본주의적 축적 기반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고 있다. 이 소작수입을 유력수입원으로 하여 細川家는 자본주의적 기업가, 대주주의 측면을 유지해가면서 華族 가운데 제1위의 수입(1930년)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千田稔 1987: 59).
참고문헌
- 김순전 외 1명(2008), 일제강점초기 교과서의 동화주의 교육의 전개양상, 한국일본어문학회
- 김경일(2007), 일제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 강만길(1998), 일제시대 민족해방운동의 통일전선운동, 문화체육관광부
- 문영주(2006), 일제시기 도시금융조합의 관치운영체제 형성과정 : 1929년 <금융조합령> 개정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회
- 박성진(1997), 1920년대 전반기 사회진화론의 변형과 민족개조론, 한국민족운동사학회
- 소순열(2005), 일제하 조선에서의 일본인 지주경영의 전개와 구조, 한국농업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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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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