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역할증대(중국과 일본의 역할증대), 중일관계(중국과 일본의 관계), 중일경제협력(중국과 일본의 경제협력), 중일경제교류(중국과 일본의 경제교류), 중일수산물무역제도, 중일영화산업(중국과 일본의 영화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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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일역할증대(중국과 일본의 역할증대), 중일관계(중국과 일본의 관계), 중일경제협력(중국과 일본의 경제협력), 중일경제교류(중국과 일본의 경제교류), 중일수산물무역제도, 중일영화산업(중국과 일본의 영화산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중일역할증대(중국과 일본의 역할증대)

Ⅱ. 중일관계(중국과 일본의 관계)

Ⅲ. 중일경제협력(중국과 일본의 경제협력)

Ⅳ. 중일경제교류(중국과 일본의 경제교류)
1. 정부개발원조(ODA)
1) 초기상황
2) 천안문 사태 발생이후
3) 일본의 정부개발원조 중단 선언
2. 경제교류
1) 무역
2) 기술이전

Ⅴ. 중일수산물무역제도(중국과 일본의 수산물무역제도)
1. 일본의 관세체계
2. 중국의 신무역관리제도

Ⅵ. 중일영화산업(중국과 일본의 영화산업)

참고문헌

본문내용

지하전영(Underground Movie의 중국식 표현, 地下電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른바 제6세대 감독들이다. 이들은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무렵을 전후해서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거나 문학 등을 공부하였으며 졸업 후에도 제편창에 취직하지 않고, 검열을 거부한 채 독자적인 노력이나 해외 예술영화 기금(로테르담 국제 영화제의 허벌트 발스 기금-Hubert Bals Fund-이 대표적이다)을 받아서 근근이 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이런 영화들의 시장은(중국 국내에서는 상영될 수가 없으므로) 당연히 해외의 예술 영화 시장이 된다.
제5세대는 자신들의 낭만적이고 다분히 사색적인 중국 역사와 문화에의 집요한 질문이 중국의 국내 영화계의 사정과 맞물려 그 생명을 다하자, 89년 이후부터 새로운 방법으로 외국과의 합작을 시도했다. 결국 이들의 영화가 대규모의 자본을 끌어들이며 정치적으로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소재로 타협을 하기 시작할 무렵, 해외 영화제들은 바로 이들 중국의 지하전영 감독들을 발굴해 내었던 것이다. 중국의 현대화와 갈등에 대한 개인적인 진술들과 그들의 새로운 표현 방법들이 곧, 미지의 감독들을 발굴하고 이들의 작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는 유럽 등지의 예술 영화 기금의 눈길을 끌게 되었고,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독립영화 작가들의 영화는 중국의 지독한 영화 검열 정책에 대한 비판의 장이 열리는 포럼들과 함께 국제무대의 일각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94년 4월, 당시 광전부(현 광전총국)에서는 일명, 7군자(七君子)로 통하는 7명의 감독들에게 영화제편창과 방송국, 현상소등 중국 내의 어떤 영화 제작 관련 단위도 이들과 작업을 도모하면 안된다는 결정을 내려 이 감독들의 활동을 원천 봉쇄하였다가 96년 말 이러한 결정을 철회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중국 내의 검열제도 때문에 불가능하다기보다 현재로서는 자본의 조달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의 영화 당국과 독립영화 작가들의 관계는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작가들이 말 안 듣는 말썽꾸러기 자식 놈쯤 되고, 이 감독에게는 완고하며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무거운 짐...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그 무엇쯤 되는 것 같아 무척 흥미롭다. 96년 경, 부산 영화제에 협조를 요청할 목적으로 중국을 방문한 김동호 위원장 일행이 광전부의 대표자 자격으로 나온 류우 지엔쭝과 만나는 자리에서 마침 나는 통역을 의뢰 받아 합석한 적이 있는데, 이 때도 류우 지엔쭝은 이들 젊은 감독과 부산 영화제의 결탁을 매우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영화도 제대로 완성도 있게 못 만들면서 중국 국내에서는 자본을 구할 수 없으니까 중국을 나쁘게 묘사하는 것으로 중국 정부에 적대적인 외국인들과 결탁했다. 돈 많이 줘도 영화 잘 못 만들거다...’는 요점의 논지를 폈다. 한편 이러한 정부의 관점에 대하여 감독들 역시 중국 사정에 정통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중국 내 유명한 현대 소설 작가이자 최근 <부친(父親)>이라는 영화를 제작, 감독한 우앙 쑤어(王朔)를 만났다. 그에게 ‘<귀신이 왔다>를 만든 지앙 원이 허가 없이 영화제에 출품하여 난처해지지 않았는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라고 물어봤더니,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왜 못 만들어? 중국에서 영화 만들지 말래서 다 못 만들었나? 그리고 높은 어른들 만나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 다 용서해주잖아...잠깐이야. 잠깐...’이라고 대답하여 웃은 적이 있다. 짱 위엔 역시 최근에 그에게 직접 확인한 바에 의하면 중국 국내에서도 상영될 수 있을 소재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자본을 구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지원되는 해외 영화제의 기금이란 사실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데 있어, 극히 부족한 자금이어서 사실 이들의 지원만으로 과연 중국의 독립 영화 작가들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지 의심스럽기 조차하다. 일례를 들어 허 지엔쥔이 95년 암스테르담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우체부(郵差)>는 허버트 발스 기금(Hubert Bals Fund)의 자금 지원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6800달러의 예산으로 만들어졌다. 수상 후에 그는 3번째의 작품을 준비하면서 다시 이러한 예술 기금의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예산이 한화, 2억 내지 3억에 이르는 관계로 여의치 못하였는데 그 무렵 허 지엔쥔은 ‘다 그렇지 뭐...남의 돈 받기가 그리 쉬운가? 만들고 싶으면 끝까지 되게 하는 수밖에 없지 뭐...’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중국의 명망 있는 감독이건 문제의식을 지닌 새로운 작가이건 각기 다른 유형의 투자일망정, 이들 자본이 중국의 영화인들에게 그 주도권을 맡긴다는 점에서 분명 중국에서의 중외합작은 89년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작가들이 만든 중국 영화가 국제적으로 그 시장이 존재한다는 점! 그것이 이 복잡한 해외 투자자와 중국 작가들의 네트워크를 이해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두 번째의 합작 유형은 시에파이, 즉 해외의 자본과 감독, 배우가 투입되고 중국 측에서는 노동력과 장소를 제공하는 방식의 이전 합작 패턴으로써 이러한 방법의 합작 형식은 그동안 주로 홍콩의 영화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황비홍>시리즈, <방세옥>, <청사>, <신용문객잔>, <서초패왕>, <동사서독> 등의 중국 무협과 사극을 혼합한 형태의 상업 영화들이 포함되는데, 평균 2천만 홍콩 달러가 투자되며 홍콩과 중국 이외에도 동남아시아나 세계 배급망을 통하여 많은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참고문헌
ⅰ. 손성문 외 1명(2010), 중국과 일본간 농산물 위생검역 분쟁에 관한 연구, 한국국제상학회
ⅱ. 이형근 외 1명(2010), 중국 동북지역과 일본 간 경제협력채널의 현황 및 시사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ⅲ. 영화진흥위원회(2001), 중국영화산업백서 Ⅰ
ⅳ. 한국능률협회(1988), 중일 경제교류 15년을 점검한다 : 제3국 집중연구
ⅴ. 홍석균(2006), 일본의 영화산업시장 동향, KOTRA
ⅵ. Kisup Son(2009), 중일관계의 구조적 변화와 갈등, 고려대학교 일민국제관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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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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