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한국근현대사와 근대
Ⅲ. 한국근현대사와 근현대시기구분
Ⅳ. 한국근현대사와 근현대사관련자료
1. 국무부의 문서 분류 체제
1) 중앙분류서류철(Central Files)
2) 숫자분류서류철, 1906-1910(The Numerical File, 1906-1910)
3) 십진분류서류철, 1910-1963(The Decimal File, 1910-1963)
2. 국무부 일반문서철(RG 59 General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
3. 국제회의, 위원회 및 전시회 관련 문서(RG 43 Records Of International Conferences, Commission, And Expositions)
4. 국무부 재외공관 문서(RG 84 Records Of The Foreign Service Posts Of The Department Of State)
Ⅴ. 한국근현대사와 근현대사구술자료
참고문헌
Ⅱ. 한국근현대사와 근대
Ⅲ. 한국근현대사와 근현대시기구분
Ⅳ. 한국근현대사와 근현대사관련자료
1. 국무부의 문서 분류 체제
1) 중앙분류서류철(Central Files)
2) 숫자분류서류철, 1906-1910(The Numerical File, 1906-1910)
3) 십진분류서류철, 1910-1963(The Decimal File, 1910-1963)
2. 국무부 일반문서철(RG 59 General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
3. 국제회의, 위원회 및 전시회 관련 문서(RG 43 Records Of International Conferences, Commission, And Expositions)
4. 국무부 재외공관 문서(RG 84 Records Of The Foreign Service Posts Of The Department Of State)
Ⅴ. 한국근현대사와 근현대사구술자료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이라는 제목으로 1919~1945년간 임시정부를 지원한 중국인 인사나 유지(千國勳 등 15명)의 구술기록을 발간했다. 이 자료집은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의 후속편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사연구소 편, 격동기 지식인의 세 가지 삶의 모습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가 1997년에 수집한 구술자료 10건 가운데 3건을 골라 윤문작업을 거쳐 발간한 책이다. 현대사연구소 자료총서의 하나로 발간되었으나 가독성만이 중시되어 자료집이나 증언록, 어디에도 포함될 수 없게 되었다.
지운 김철수는 구술자료와 문서자료를 함께 수록하였고, 관변자료인 신문조서를 수록하여 상호 비교가 가능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가능한 한 구술자료의 원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편집방향에 따라 발간된 자료집이다. 이러한 편집방향은 색인이나 편집자주, 해설 등이 뒷받침될 때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 점에서는 충분한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발간되었다. 이하에서 이 자료집에 대한 내용과 성격, 자료적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김철수(1893~1986)가 남긴 기록(문헌자료와 구술자료)의 일부는 이미 1988년에 고 이균영교수에 의해 학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균영이 소개한 내용 외에도 미공개기록이 다수 있다는 점으로 인해 자료 열람의 열망은 높아졌다. 김철수자료가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김철수 개인에 대한 관심과 자료의 내용 때문이었다. 첫째, 김철수는 남한에 남은 거물급 사회주의자라는 점에서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이하게도 김철수는 남한에 우익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 남아서 생활을 했고,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둘째, 소개된 내용으로 인해 김철수가 일반인들의 인식과는 달리 좌익소아병을 극복하고 거시적 차원에서 통일운동을 모색한 정치지도자로서 면모를 가졌음이 알려졌다.
그러나 연구자들에게 가장 관심을 끌었던 점은 자료의 내용이었다. 이 자료가 소개되었던 1980년대 후반은 한국 근현대사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였으나 사회주의 관련 자료는 풍부하지 못했다. 요사이 중국과 러시아측의 자료가 서서히 공개되어 근현대사 연구자료 이용의 지평이 넓어지기는 했으나 운동 당사자의 주체적인 자료는 부족한 상황이다. 더구나 기존 연구는 해방 직후 한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외국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었는데, 이 자료는 해방 공간에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려는 당시 지도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연구자를 위해’ 만든 김철수의 자료가 학계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당연했다.
지운 김철수에는 김철수가 직접 쓴 저술기록(회고록), 구술기록, 공판기록, 신문자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 공판기록은 내용이 소략하고 구술기록이나 저술기록과 내용이 중복되어 자료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신문자료도 일제가 보도를 허용한 범위 내에서 게재되었으므로 내용은 매우 소략하다. 따라서 저술기록과 구술기록이 가장 큰 비중을 갖는다. 이중에서 본고와 관련되는 부분은 구술기록이다.
김철수는 생전에 많은 구술기록을 남겼으나 지운 김철수에 수록한 구술기록은 김소중 소장본, 정진석 소장본, 김효명 소장본 등이다. 이 가운데 정진석 소장본(녹음테입 10개, 41,000여 자)은 본래 12개였으나 소장자가 보관 도중에 2개를 분실하여 10개만이 전해진다. 이 구술기록은 저술기록과 거의 동일한 편제로 구성되어 있다. 김소중 소장본(녹음테입 12개, 53,000여자)은 김소중 외에도 임규호나 박명주 등 주변 인물들을 대상으로 남긴 구술기록을 손자인 김소중이 수합하여 편집한 것이어서 중복된 내용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소중이 직접 녹음을 한 장덕수에 대한 언급은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장덕수에 대한 현재 학계의 평가와 상이점이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어서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김효명 소장본(녹음테입 10개, 23,400여자)은 앞의 두 구술기록과 달리 면담자의 역할이 강화된 기록이다. 김효명은 부친(김재봉의 유복자라고 주장)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고자 적극적으로 증언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조봉암과 김재봉 관련 내용은 연구자에 따라 해석이 달리 이루어질 소지가 적지 않다.
지운 김철수는 능동적으로 생산된 기록이다. 김철수가 직접 기록을 남긴 이유는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는 자신의 활동을 여러 차례 외부에 알렸으나 그 결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학계에서 발표된 사회주의운동에 관한 연구물에 대해 불신감을 가졌다는 점이다. 김철수는 반공제일을 국시로 내건 남한의 체제 안에서 사회주의운동가들의 행적이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없다는 불신감이 강했다. 그는 당시 연구가 철저히 일본 관헌에 의해 작성된 문헌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했다. 아울러 당시 연구성과가 사회주의자로서 경력이 있는 일부 연구자들이 자신이 속했던 계파를 중심으로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자신이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김철수는 자신이 만든 몇몇 기록이 소실되는 과정을 겪은 후 노년에 들어서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열망을 강하게 가졌다. 그는 구술기록을 남기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였고, 말년에는 구술기록을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하기까지 했다.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적극성은 기록에 생산자의 의도가 강하게 투영될 우려를 낳을 수 있다. 또한 김철수는 특정 당파에 소속하고 있었으므로 당파성에서 자유스러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객관적인 자세로 내용을 구성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김철수는 가능한 한 자신의 업적이나 기호와 무관한 증언으로 일관하고자 했다. 이 점은 자신에 대한 평가에서도 잘 나타난다.
참고문헌
서준영,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수록인물과 인물학습 활용 방안, 계명대학교, 2010
서인원, 고등학교 과정에서 한국 근현대사 수업의 현황과 전개, 역사실학회, 2006
이영학, 한국근현대사와 국가기록물 관리, 한국기록학회, 2002
정영순, 한국근현대사에 있어서 주체성 문제 고찰, 백산학회, 2004
한상철 외 1명, 내가 쓰는 한국 근현대사, 우리교육, 2011
홍순권, 한국 근현대사의 인식과 역사교과서 수정 논란, 광장, 2009
현대사연구소 편, 격동기 지식인의 세 가지 삶의 모습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가 1997년에 수집한 구술자료 10건 가운데 3건을 골라 윤문작업을 거쳐 발간한 책이다. 현대사연구소 자료총서의 하나로 발간되었으나 가독성만이 중시되어 자료집이나 증언록, 어디에도 포함될 수 없게 되었다.
지운 김철수는 구술자료와 문서자료를 함께 수록하였고, 관변자료인 신문조서를 수록하여 상호 비교가 가능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가능한 한 구술자료의 원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편집방향에 따라 발간된 자료집이다. 이러한 편집방향은 색인이나 편집자주, 해설 등이 뒷받침될 때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 점에서는 충분한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발간되었다. 이하에서 이 자료집에 대한 내용과 성격, 자료적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김철수(1893~1986)가 남긴 기록(문헌자료와 구술자료)의 일부는 이미 1988년에 고 이균영교수에 의해 학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균영이 소개한 내용 외에도 미공개기록이 다수 있다는 점으로 인해 자료 열람의 열망은 높아졌다. 김철수자료가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김철수 개인에 대한 관심과 자료의 내용 때문이었다. 첫째, 김철수는 남한에 남은 거물급 사회주의자라는 점에서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이하게도 김철수는 남한에 우익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 남아서 생활을 했고,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둘째, 소개된 내용으로 인해 김철수가 일반인들의 인식과는 달리 좌익소아병을 극복하고 거시적 차원에서 통일운동을 모색한 정치지도자로서 면모를 가졌음이 알려졌다.
그러나 연구자들에게 가장 관심을 끌었던 점은 자료의 내용이었다. 이 자료가 소개되었던 1980년대 후반은 한국 근현대사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였으나 사회주의 관련 자료는 풍부하지 못했다. 요사이 중국과 러시아측의 자료가 서서히 공개되어 근현대사 연구자료 이용의 지평이 넓어지기는 했으나 운동 당사자의 주체적인 자료는 부족한 상황이다. 더구나 기존 연구는 해방 직후 한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외국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었는데, 이 자료는 해방 공간에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려는 당시 지도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연구자를 위해’ 만든 김철수의 자료가 학계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당연했다.
지운 김철수에는 김철수가 직접 쓴 저술기록(회고록), 구술기록, 공판기록, 신문자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 공판기록은 내용이 소략하고 구술기록이나 저술기록과 내용이 중복되어 자료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신문자료도 일제가 보도를 허용한 범위 내에서 게재되었으므로 내용은 매우 소략하다. 따라서 저술기록과 구술기록이 가장 큰 비중을 갖는다. 이중에서 본고와 관련되는 부분은 구술기록이다.
김철수는 생전에 많은 구술기록을 남겼으나 지운 김철수에 수록한 구술기록은 김소중 소장본, 정진석 소장본, 김효명 소장본 등이다. 이 가운데 정진석 소장본(녹음테입 10개, 41,000여 자)은 본래 12개였으나 소장자가 보관 도중에 2개를 분실하여 10개만이 전해진다. 이 구술기록은 저술기록과 거의 동일한 편제로 구성되어 있다. 김소중 소장본(녹음테입 12개, 53,000여자)은 김소중 외에도 임규호나 박명주 등 주변 인물들을 대상으로 남긴 구술기록을 손자인 김소중이 수합하여 편집한 것이어서 중복된 내용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소중이 직접 녹음을 한 장덕수에 대한 언급은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장덕수에 대한 현재 학계의 평가와 상이점이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어서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김효명 소장본(녹음테입 10개, 23,400여자)은 앞의 두 구술기록과 달리 면담자의 역할이 강화된 기록이다. 김효명은 부친(김재봉의 유복자라고 주장)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고자 적극적으로 증언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조봉암과 김재봉 관련 내용은 연구자에 따라 해석이 달리 이루어질 소지가 적지 않다.
지운 김철수는 능동적으로 생산된 기록이다. 김철수가 직접 기록을 남긴 이유는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는 자신의 활동을 여러 차례 외부에 알렸으나 그 결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학계에서 발표된 사회주의운동에 관한 연구물에 대해 불신감을 가졌다는 점이다. 김철수는 반공제일을 국시로 내건 남한의 체제 안에서 사회주의운동가들의 행적이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없다는 불신감이 강했다. 그는 당시 연구가 철저히 일본 관헌에 의해 작성된 문헌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했다. 아울러 당시 연구성과가 사회주의자로서 경력이 있는 일부 연구자들이 자신이 속했던 계파를 중심으로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자신이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김철수는 자신이 만든 몇몇 기록이 소실되는 과정을 겪은 후 노년에 들어서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열망을 강하게 가졌다. 그는 구술기록을 남기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였고, 말년에는 구술기록을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하기까지 했다.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적극성은 기록에 생산자의 의도가 강하게 투영될 우려를 낳을 수 있다. 또한 김철수는 특정 당파에 소속하고 있었으므로 당파성에서 자유스러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객관적인 자세로 내용을 구성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김철수는 가능한 한 자신의 업적이나 기호와 무관한 증언으로 일관하고자 했다. 이 점은 자신에 대한 평가에서도 잘 나타난다.
참고문헌
서준영,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수록인물과 인물학습 활용 방안, 계명대학교, 2010
서인원, 고등학교 과정에서 한국 근현대사 수업의 현황과 전개, 역사실학회, 2006
이영학, 한국근현대사와 국가기록물 관리, 한국기록학회, 2002
정영순, 한국근현대사에 있어서 주체성 문제 고찰, 백산학회, 2004
한상철 외 1명, 내가 쓰는 한국 근현대사, 우리교육, 2011
홍순권, 한국 근현대사의 인식과 역사교과서 수정 논란, 광장,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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