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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일관계(북한일본관계)와 북일교섭, 북일관계(북한일본관계)와 북일수교회담, 북일관계(북한일본관계)와 평양선언, 북일관계(북한일본관계)와 한일협정문서공개, 북일관계(북한일본관계)와 한일관계, 제언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북일관계(북한일본관계)와 북일교섭

Ⅲ. 북일관계(북한일본관계)와 북일수교회담

Ⅳ. 북일관계(북한일본관계)와 평양선언

Ⅴ. 북일관계(북한일본관계)와 한일협정문서공개

Ⅵ. 북일관계(북한일본관계)와 한일관계
1. 「특수한 관계」와 국제관계
2. 최전선(最前線)과 후방(後方)

Ⅶ. 결론 및 제언

참고문헌

본문내용

정 당시 미흡했던 과거사 문제에 대해 진일보한 일본 정부의 의사표명이 반영될 가능성은 있다.
일본정부는 무라야마 수상의 담화와 평양선언에서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죄를 표명했고 이러한 수준의 사죄표명이 기본조약에 반영될 가능성은 매우 크다. 다만 문서공개 후 현안문제로 재부상한 군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일본으로서는 마지막 남은 전후처리의 종결과 북한으로부터의 안보위협의 제거, 그리고 북한의 급속한 붕괴로 인한 일본의 안전보장상의 위협을 줄이기 위해서도 북일수교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 납치자 문제가 남아 있고 더욱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이 북일관계를 상당한 기간 냉각시킬 것이다. 북일 관계정상화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관건은 북핵문제 해결에 의한 북미관계 안정화와 일본의 정치적 결단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Ⅵ. 북일관계(북한일본관계)와 한일관계
1. 「특수한 관계」와 국제관계
먼저, 한일 두 나라사이에서 북한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것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한국에 있어서 북한의 문제는 같은 민족의 문제이다. 실제로 남북간에 합의한 기본합의서에는 쌍방의 관계에 대해서 「나라와 나라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한 관계」라고 서로 확인하고 있다.
이것에 반해서 일본과 북한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외국, 즉, 국제 관계이다. 그 관계에 인식의‘갭’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어도, 역시 한일간의 장벽은 높다.
일본인에게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의 헌법 제3조의 영토 조항이다. 그 조항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있는데, 글자대로 해석하면, 중국과의 국경에 접해 있는 백두산이나 압록강, 그리고 당연히 평양도 한국의 영토라는 것이다.
이것이 「특수한 관계」의 헌법적 표현이라는 것인가.
한국에 있어서 북한과의 경계는 「군사 분계선」이지 결코 국경이 아니다. 북한에 사는 사람들을 「주민」이라고는 불러도 국민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북경(北京)에서 열린 북한의 핵에 관한 회담은 어디까지나 「6자 회담」이지 6개국 회담이 아니다……. 그 반면에, 남북이 각각 따로따로 UN에 가입하고 있다는 현실도 있다.
그러한 분단에서 유래하는 미묘한 사정은 일본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안이어, 한일 양국간의‘갭’의 근원의 하나라고도 생각된다.
2. 최전선(最前線)과 후방(後方)
냉전(冷戰)시대를 통해서 북한과 어떻게 대처해 왔는가 라는 차이도 크다.
냉전의 최전선의 위치에 처한 한국은, 그 대립의 고통을 피부로 뼈저리게 느껴왔다. 테러나 포격전 등, 한국전쟁이 아직도 종결되지 않았다는 현실을 한국 국민들은 지신들의 눈앞에서 몇 차례나 반복해서 당해 왔는지 모른다.
그것에 비해서, 냉전의 후방에 있었던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대체로 평화스러운 나날을 보내왔다. 한국전쟁에서 일본이 미군의 후방지원기지로서 이용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휴전상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조차도 많은 일본인은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납치 문제를 둘러싼 한일간의‘갭’에 있어서도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납치가 한국전쟁의 영향이 미친 냉전속에서 일어난 비극이라는 인식이 있는지 없는지, 와도 무관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Ⅶ. 결론 및 제언
북한과 일본 관계의 정상화는 북미관계 정상화와 더불어 남북한 냉전구조의 해체를 가져오는 제도적인 장치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일본과의 수교는 북한이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책임있는 일원으로 참가함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북한의 개혁, 개방을 위해 불가결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1990년 3당 공동성명이후 1998년 초에 이르기까지 세 차례의 수교교섭 움직임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최근 일본 전 총리 무라야마를 단장으로 하는 초당파 정당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 당비서 김용순과 회담을 갖고 양국 수교 교섭 재개에 합의함에 따라 협상 재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수교교섭이 적극화될 수 있을 것인가는 아직 불투명하다.
북일교섭 과정을 살펴보면 국제정치 변수, 국내정치 변수, 북일 양국의 협상정치라는 세 가지 요인이 시기별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작용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초기 교섭의 상황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외압을 수용한 일본의 지연 전략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비해 북한은 국제정치적 고립을 탈피하고 일본의 경제적인 지원을 얻을 목적으로 일본에 양보할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국제적인 외압과 외무성의 강경한 입장으로 인하여 북한의 양보를 수용하지 못하고 강경입장을 고수하였다.
북일 교섭이 결렬되고 난 이후, 일본 국내정치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인 납치 의혹 사건으로 인한 일본 여론의 악화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북일 교섭에 악재로 작용하면서 교섭의 진전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또한 1994년까지 북한이 북미협정에 몰두하게 됨으로써 북일 교섭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제네바합의 이후 북한의 북일 교섭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일본의 접근 여하에 따라서는 급진전을 보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북일관계는 약간의 진전을 보이기는 했으나, 일본의 국내정치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따라서 현재 북일 교섭은 국제적인 요인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일 양국의 이해관계 차이로 인하여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문헌
김기범, 한일협정 문서 공개의 내용과 영향,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2005
도용승, 북일 경제관계의 현황과 과제, 한국수출입은행, 2007
서동만, 북일 수교 교섭의 전망과 과제, 숙명여자대학교통일문제연구소, 2001
소차목정부, 한일 ·북일관계의 신국면, 한국지역사회연구소, 2002
이찬우, 북일 수교회담에 바란다 : 한일 방식 아닌 중일 방식 과거청산을, 민족21, 2002
윤덕민, 일북 평양선언과 경제협력, 한국국제지역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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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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