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시대]식민지시대(일제시대, 일제강점기)의 자본주의화, 재일조선인, 식민지시대(일제시대, 일제강점기)의 재일한인노동운동, 여성황민화운동, 식민지시대(일제시대, 일제강점기)의 탄광노동자(탄광근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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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식민지시대]식민지시대(일제시대, 일제강점기)의 자본주의화, 재일조선인, 식민지시대(일제시대, 일제강점기)의 재일한인노동운동, 여성황민화운동, 식민지시대(일제시대, 일제강점기)의 탄광노동자(탄광근로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식민지시대(일제시대, 일제강점기)의 자본주의화
1. 식민지수탈론
2. 식민지근대화론
3. 평가

Ⅱ. 식민지시대(일제시대, 일제강점기)의 재일조선인

Ⅲ. 식민지시대(일제시대, 일제강점기)의 재일한인노동운동

Ⅳ. 식민지시대(일제시대, 일제강점기)의 여성황민화운동

Ⅴ. 식민지시대(일제시대, 일제강점기)의 탄광노동자(탄광근로자)

참고문헌

본문내용

Ⅴ. 식민지시대(일제시대, 일제강점기)의 탄광노동자(탄광근로자)
일본의 탄광노동자는 342,873명에서 137,975명으로 감축되고 있었다. 탄광노동자의 감축현상은 일본에서 발생한 일련의 경제공황에 기인한 것이다. 반동공황을 필두로 이어지는 경제공황은 탄광업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금융공황이 회복되기도 전에 세계대공황의 여파는 昭和공황을 발생시켰고 일본산업계 전반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昭和공황으로 인해 일본 전국에서는 200만 - 250만의 실업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석탄업계도 심각한 경영위기를 맞게 되자 광산회사는 경영의 합리화를 통해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경영의 합리화는 갱내의 기계화 추진, 조업단축, 해고, 노동강화, 임금의 미지불 등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탄광업계의 인원정리에 대해 노동자는 쟁의로 맞섰다. 三菱나마즈다 6갱에서 일어난 쟁의를 필두로 4월에는 大峯 2갱, 5월에 日鐵二瀨稻筑갱과 高尾 1갱, 住友忠외, 6월에 龜山, 島廻, 7월에 合尾, 第二目尾의 각 갱으로 확대되었고, 아소한인노동쟁의는 치쿠호지역에서는 가장 마지막에 일어난 쟁의이다.
아소한인노동쟁의의 직접적인 계기는 사업자측이 탄갱의 조업규모를 단축하는 과정에서 한인갱부를 轉坑시킨 것인데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후쿠오카현의 다른 탄광보다도 더 가혹하게 갱부를 착취했던 아소상점의 경영방법이다. 아소상점은 한인노동자를 채용했는데, 고용주측이 행한 갱부착취와 비인도적 처사의 내용은 크게 納屋(나야)제도를 통한 착취와 부상갱부에 대한 처우라는 두 가지 점을 들 수 있다. 본 장에서는 아소탄광한인노동자의 임금, 나야제도를 중심으로 생활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財團法人協調會福岡出張所이 후쿠오카현 관내 탄광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이다. 아소탄광의 임금 내역은 인근 탄광에 비해 평균임금의 경우 12원 70전 - 18원 30전이 낮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아소탄광에서 쟁의가 일어났을 때 한인노동자들이 제시한 <요구사항 16개조>에 따르면 한인노동자들은 1일 평균 50 - 60전의 임금을 받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한달노동일수 25일로 환산해보면 평균임금은 12.5 - 15원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부분의 한인노동자들은 임금내역 가운데 최저임금 13원에 해당하거나 평균임금 20원에 밑도는 임금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저임금외에도 탄광회사측은 임금을 현금으로 지급하지 않고 金券으로 지급하여 노동자의 생활을 곤란하게 했다. 아소탄광의 갱부였던 黃學成의 증언에 의하면 ‘金券은 1전, 2전, 5전, 10전, 20전, 50전, 1원 권으로 그 광산주 집안의 紋이 인쇄되어 있어서 해당 광산 매점에서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매점에는 물품수가 적어서 쌀 이외에는 취급하지 않았고 (쌀의 경우도)값이 싼 安南米나 臺灣米를 內地米와 같은 가격으로 판매하였다’고 한다.
1932년 東京(토오쿄오)과 京都(쿄오토오)市가 발표한 한인세대주의 생계비 내역이다. 아소한인노동자의 평균임금 20원은 토오쿄오나 쿄오토오 한인노동자 임금보다 2원 89전 - 24원이 적은 금액이었다. 이를 다시 같은 시기 일본노동자와 비교해보면 토오쿄오 불량주택지구에 사는 도시하층민의 48.4%, 공장노동자의 21.5%, 공장실업자의 65.2%에 해당하고 일용실업자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이다. 따라서 아소쟁의단원들은 요구사항 제3항에 식량도 조달하지 못하는 현행 임금구조에 불만을 들어 최저임금제 도입을 주장한 것이다.
쟁의단 <요구사항 16개조>에는 나야제도의 철폐도 명시되어 있다. 아소한인노동자들은 나야제도에 의해 구조적인 착취상태에 놓여있었다. 나야제도는 飯場(함바)제도와 함께 일본광산업에서 널리 쓰여지고 있던 노무관리제도이다. 석탄광산에서는 나야제도, 금속광산에서는 함바제도라는 이름이 많이 쓰여졌으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보여진다. 나야함바제도의 고전적인 형태는 광업자본가에게 고용된 納屋頭(나야가시라)飯場頭(한바가시라)가 광부의 모집과 생활관리, 채굴개항 등의 작업청부, 임금의 일괄관리를 맡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제도는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1888년 日本人이라는 잡지에 松岡好이 <高島탄광의 참상>이라는 제목의 르포를 발표함으로써 나야제도의 실태가 밝혀지게 되고, 納屋頭에 의한 임금착취장시간 노동열악한 식사 등 나야제도의 폐해는 당시 사회문제화되었다. 또한 나야제도의 사용은 濫掘을 초래하였으므로 1900년대에 걸쳐 차차 폐지되어 納屋頭와 飯場頭는 광부의 모집과 생활관리만을 주요업무로 하게 되었다. 나야제도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노동조합이 이 제도의 폐지를 내걸고 투쟁한 것과 함께 1920년대 반동공황이후 廢山과 사업축소로 인해 노동력부족이 해소되면서 급속히 해체되었다. 그 후 금속광산에서는 友子동맹(도모꼬도메이)라는 상호부조조직이 형성되었고, 석탄광산에서는 世話方제도에 의해 노무관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일본광산업에서 노무관리는 나야제도에서 회사의 직접관리체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후쿠오카현의 여러 탄광에서는 여전히 나야제도가 노무관리를 담당하고 있었고, 아소상점 역시 나야제도를 운영했다. 모든 탄갱에는 수십 개 組의 함바가 있어서 갱부들은 모두 여기에 소속된다. 또한 각각의 조마다 納屋頭가 있는데 納屋頭를 親方이라 하고 갱부를 子方이라고 부른다. 親方은 子方을 거느리고 회사에 노무를 제공하며 임금을 일괄적으로 받아 子方에게 분배한다. 즉 親方은 노무공급청부업자의 성격을 갖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들도 탄광에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로서 회사노무 아래에서 일하는 것이다. 이같은 나야제도에 속하지 않고 회사에 직속된 갱부가 있기는 하지만 그 수는 극소수이다.
참고문헌
김인덕(1997), 식민지시대 재일조선인 청년운동에 대한 연구, 한국사학회
김명섭(2001), 재일 한인아나키즘운동 연구, 단국대학교
김민영(1999), 식민지시대, 일본 탄광노무담당자의 노동문제 인식, 한국동서경제학회
박근창(1955), 식민지의 자본주의화, 중앙대학교
이승엽(1998), 신여성 - 식민지시대 말기 여성의 황민화운동,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이승일 외 1명(2009),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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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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