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일제하)의 사회주의운동, 민중계몽운동, 농지탈환운동, 민족개조론, 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일제하)의 자유주의적 사회발전론, 친일파, 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일제하)의 제주도회사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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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일제하)의 사회주의운동, 민중계몽운동, 농지탈환운동, 민족개조론, 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일제하)의 자유주의적 사회발전론, 친일파, 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일제하)의 제주도회사설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일제하)의 사회주의운동

Ⅱ. 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일제하)의 민중계몽운동

Ⅲ. 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일제하)의 농지탈환운동

Ⅳ. 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일제하)의 민족개조론

Ⅴ. 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일제하)의 자유주의적 사회발전론
1. 개인․사회의 개조방향
1) 인격개조의 방향
2) 사회개조의 방향
2. 반전통․반사회주의적 입장
1) 반전통적 입장
2) 반사회주의적 입장

Ⅵ. 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일제하)의 친일파

Ⅶ. 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일제하)의 제주도회사설립

참고문헌

본문내용

내던지고 일본어를 사용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고치며 심지어 조선의 것은 소설이나 만화조차도 재미가 없다고 하는 등 철저히 조선을 부정하고 일본 사람이 되기를 선호할 뿐만 아니라 그런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런 주인공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학까지 나오고도 사회주의에 물들어 감방생활을 5년이나 하고 일자리도 찾지 못하고 빈둥거리는 아저씨의 모습이 한심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 이처럼 주인공은 폭력적 무지를 바탕으로 세상을 편히 살기 위한 생활의 수단으로 적극적인 친일을 하게 된다.
또 하나의 친일 인물을 전광용의 <꺼삐딴리>에서 볼 수 있는데, 일제 강점기 제국대학 의학부 출신인 의사 이인국은 ‘잠꼬대까지 국어(일본어)로 할 정도가 아니면’ 도저히 받을 수 없다는 ‘국어상용의 가(家)’의 액자를 총독부로부터 받을 정도로 철저히 친일적인 생활방식에 의해서 살아간다. 당연히 그의 주요 고객은 일본인과 경제력과 출세를 함께 가지고 있는 친일 성향의 부류였다. 그에 반해 돈이 없는 가난한 민중이나 독립운동가는 철저히 외면하게된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국토가 분단되어 북한에는 소련군이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하는 전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자 당시 북한에 있었던 이인국에게는 너무나 불리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친일파의 상징과도 같았던 이인국은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고, 체포되어 죽음만을 기다릴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 상황 속에서도 그는 살아날 방도를 찾는데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가 일제시대는 일어를 배워 출세 가도의 발판으로 삼듯이 소련군 점령하에서는 러시아를, 이남으로 내려와서는 영어를 배우는 등 시대의 힘이 이동할 때마다 그 힘을 이용하여 부를 쌓는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재능을 개인의 치부를 위해 활용하여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계속된 출세의 길을 걷게 된다.
이와 같이 친일의 길을 걸어갔던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필연성이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의 비극이 파생한 결과라 한다면 그들의 비열함과 죄악이 그들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앞으로 전개될 우리 역사를 조금이라도 바로 잡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행위가 과연 ‘생존을 위한 친일인가 아니면 출세를 위한 친일인가’에 대한 역사적 판단과 그들의 행위를 어디까지 이해하고 단죄해야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Ⅶ. 일제강점기(식민지시대, 일제하)의 제주도회사설립
조선실업신용대감(1931)에 따르면 당시 제주도에는 7개의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는데 그 중 일본인 회사는 3개사, 한국인 회사는 4개사이다. 그 후 이러한 제주도민자본의 공동투자를 통하여 주식회사를 설립하려는 노력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 일제 식민지기 다수의 회사가 설립되었다. 제주도민들 가운데 유력자본가들은 자체적으로 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인이 설립한 회사와 경쟁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설립된 제주도민회사의 실태를 보면 그 특징을 몇 가지 엿볼 수 있다.
『朝鮮總督府官報(1910~1945)』에 의하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제주도내 설립된 회사는 52개사이다. 1920년대에 8개사에 불과하였으나 1930년대에는 18개사, 1940년대 23개사로 회사설립이 증가하였다. 자본규모별 현황을 보면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가속화됨에 따라 회사의 설립 수가 증가함과 동시에 자본금 10만 원 이하의 회사 설립도 그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아울러 자본금이 30만 원 이상 2개사는 일본인이 설립한 제주도어업(주)과 제주자동차(주)로서 대규모 자본금에 따른 제주인의 회사설립은 없었다. 이에서 보면 당시 제주자본은 규모 면에서 30만 원 미만이 한계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산업별 진출현황을 살펴보면 제조업에 16개사(자본금 총액 1,125,000원), 운수업에 16개사(자본금 총액 970,950원)가 진출하여 각각 전체의 30.7%를 점하고 있었다. 그 외에 상업에는 전체의 15.3%에 해당하는 8개사(322,000원)가 진출하였고, 양조업에 7개사(558,000원), 수산업에 3개사(302,000원), 전 기업에 1개사(100,000원), 기타 영화, 연극에 1개사(21,000원) 등이었다. 이상에서 볼 때 당시 한국인 회사설립에 제주도민의 토착자본들이 적극 참여하면서 일본인의 회사설립에 비해 12개사 정도 많았지만 자본금에서는 다소 적은 편에 속한다. 당시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주력한 산업분야는 제조업, 운수업, 상업 등이었으며, 특히 한국인은 주조회사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제주자본의 규모나 당시 시장상황에 비추어 볼 때 제주인들이 투자하기에는 주조업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선택과 집중의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국적별로는 한국인 30개사, 일본인 18개사, 한일합자 4개 회사이며 그 중에 34개 회사는 제주도민이 직접 설립하거나 경영에 참여했던 회사들이다. 이를 회사형태별로 보면 주식회사 43개사, 합자회사 4개사, 합명회사 4개사, 유한회사 1개사로 주식회사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회사의 소멸형태를 보면 해산이 12개사, 합병 1개사, 상호변경 6개사이며 소멸 시기는 1920년대 1개사, 1930년대 5개사, 1940년대 13개의 회사가 소멸되었다. 이러한 제주도민의 중심이 된 회사설립은 식민지체제 하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체제에 편입되어 갔다는 점에서 일면 제한적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의 자본력을 결합하여 주체적인 도민자본을 형성하였고 제주도 최초의 근대자본가 계층이 형성되어 갔다는 점에서 일면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참고문헌
권윤진(2004) - 한말 계몽운동에서의 민족문제인식과 근대개혁론, 연세대학교
백은경(2008) - 일제시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교과서 서술 검토, 고려대학교
박찬승(2000) - 조선후기 일제하 하의삼도의 농지탈환운동, 역사문화학회
정윤재(2005) - 일제강점기 민족생존의 정치사상 : 민족개조론과 민족문화건설론,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진관훈(1999) - 일제하 제주도 농촌경제의 변동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한상범(2002) - 21세기 민족문제와 일제잔재 : 친일파의 지배구조 청산, 철학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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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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