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한국근현대사와 운요호사건
Ⅱ. 한국근현대사와 강화도조약
1. 강화도 조약의 체결 과정
1) 일본의 침략적 교섭
2) 조약의 체결
2. 강화도 조약(1876)의 내용
1) 성격
2) 강화도 조약의 주요 내용과 일본의 의도
3. 수호 조규 부록과 통상 장정의 체결
Ⅲ. 한국근현대사와 임오군란
1. 임오군란의 원인
2. 임오군란의 결과
Ⅳ. 한국근현대사와 개항기
Ⅴ. 한국근현대사와 105인사건
Ⅵ. 한국근현대사와 한국독립운동
Ⅶ. 한국근현대사와 민족해방운동
1. 1910년대
1) 국내 - 도시 중산층, 유림, 학생, 개화지식층이 중심
2) 국외
2. 3․1 운동
3. 1920년대 이후의 독립운동
1) 국내
2) 국외
Ⅷ. 한국근현대사와 전라남도 진도
1. 3․1운동
2. 청년운동
3. 진도소작쟁의
참고문헌
Ⅱ. 한국근현대사와 강화도조약
1. 강화도 조약의 체결 과정
1) 일본의 침략적 교섭
2) 조약의 체결
2. 강화도 조약(1876)의 내용
1) 성격
2) 강화도 조약의 주요 내용과 일본의 의도
3. 수호 조규 부록과 통상 장정의 체결
Ⅲ. 한국근현대사와 임오군란
1. 임오군란의 원인
2. 임오군란의 결과
Ⅳ. 한국근현대사와 개항기
Ⅴ. 한국근현대사와 105인사건
Ⅵ. 한국근현대사와 한국독립운동
Ⅶ. 한국근현대사와 민족해방운동
1. 1910년대
1) 국내 - 도시 중산층, 유림, 학생, 개화지식층이 중심
2) 국외
2. 3․1 운동
3. 1920년대 이후의 독립운동
1) 국내
2) 국외
Ⅷ. 한국근현대사와 전라남도 진도
1. 3․1운동
2. 청년운동
3. 진도소작쟁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혹은 유혹하고,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농작물의 강제징수를 꾀하고, 쟁의조건으로 항의하는 소작인들을 난타하여 자못 약탈과 살육을 겸하는 그 행동은 소위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다고 비난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당시 진도소작쟁의는 그 핵심에 동척과 조선흥업회사가 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즈음 조선인 지주의 한 사람인 孫炳翼이 자기 소작인들이 소작료를 불납한다고 경찰에 신고하여 의신면 침계리 사는 조용근, 조용술 외 8명이 1월 22일 경찰에 호출되었다. 소작인들은 서장 이하 경찰들의 협박과 구타를 당하고 강제로 소작료를 납부하겠다는 승낙서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월 28일 경찰은 진도군 고군내면 소작간부 崔在汶과 郭文煥을 구금하였다. 그 이유는 이들이 소작회원들에 대해 지주들의 요구대로 소작료를 6,7할을 내고는 도저히 살 수 없으니 4할이 아니면 절대 내지 말라고 하였고 이를 위반한 회원들에게 벌금을 받았는데, 경찰은 이에 대해 공갈취재니 소요선동이니 하고 붙잡아다가 즉결심판으로 29일의 구금을 언도한 것이다.
지주측은 또 소작인들의 재산 차압을 단행하여 2월 6일 집달리 3명, 경관 3명, 지주단 일동 등이 의신면 침계리에 들러 소작인들의 가산 집기에 차압표를 붙여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고 한다. 2월 8일 소작회에서는 제2회 정기총회를 열었으나 돌연 경찰이 해산을 명하고 박순직(朴淳稷) 외 2명을 검속하였으며, 회원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경찰이 규칙 수정위원 소진호(蘇鎭浩)에게 규칙 수정 중에 소작료를 4할로 한 것을 5할로 하라고 명하자 소진호가 이를 끝내 거부하여 일어났다.
이 같은 지주와 소작인간의 갈등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 지주들은 1924년 12월초에 이미 공동징수의 기도를 포기하였다. 대신 지주들은 12월 17일 비밀리에 회의를 갖고 소작료 불납자에 대해서는 차압수속을 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지주회에 위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차압을 위해서는 차압적립금 6만원과 그 외의 여러 경비가 필요하였다. 이에 대지주들은 자신들의 경비 부담이 많아질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당시 대지주들은 비교적 소작인들에게 양보적인 태도를 취해왔기 때문에 중소지주에 비해 소작인들의 지주에 대한 반발은 강도가 약했다. 따라서 대지주들은 중소지주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자기가 보다 큰 경비를 부담한다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지주회에서 탈퇴를 희망하고, 또는 지주회의 해산을 주장하는 자까지 나오게 되어 지주회는 스스로 붕괴되는 형세가 되었다.
소작회는 2월 24일 다시 회의를 속개하여 경찰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회칙 수정안 등을 통과시켰는데, 그 내용은 1) 회장제도를 위원 제도로 변경하여 박인배(朴仁培) 외 19인을 선정함, 2) 논의 소작료는 5할로 하던 것을 4할 이내로 할 것, 다만 경작지 1평에 대해 총 수확고가 1되5홉 이상 되는 논은 소작료를 5할, 1되 5홉 이하 1되까지는 4할, 1되 이하 5홉까지는 3할, 5홉 이하는 2할씩을 지주에 납부할 것 등이었다. 진도 경찰이 이날 총회의 결의를 묵인한 것으로 보아 소작회의 이 같은 안은 아마도 지주측과의 일정한 타협 속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경찰과 군(郡)이 개입하여 지주에게는 강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소작인의 계급의식만을 치열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설득하고, 소작인에게는 투쟁을 계속한다면 장래 소작인에게 불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협박하여 소작료는 5할로 할 것, 다만 관습 또는 사정에 의해 그 이하로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조정을 하였다고 한다.
결국 이 소작쟁의는 지주측과 소작인측이 어느 쪽도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타협에 의해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소작쟁의를 지도한 이는 누구였을까. 그것은 소진호, 박종협, 박순직 등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진호는 진도소작쟁의를 1925년 1월에 개최된 전남해방운동자동맹 임시총회에 보고한 인물이다. 그는 이후 진도필연단의 조직을 주도하며, ML파로서 이후 신간회 광주지회에 참여하였다가 제34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또 1930년대 적색농민조합에 관여한 박종협(朴鍾浹)의 신문기록을 보면 박종협은 1924년 7월 진도소작인회를 조직하여 그 총무가 되었고, 소작쟁의를 지도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박종협도 이 쟁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이 쟁의와 관련하여 경찰에 의해 구속된 朴淳稷도 주요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1920년대 진도의 민족운동을 개관해 보았다. 1920년대 진도에서도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적 청년회, 사상단체, 소작인회, 진보적인 청년회 등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은 다른 군에 비해 매우 미약한 것이었으며, 신간회 지부 등은 결성의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같은 도서지방인 완도 등지와도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진도의 민족운동은 당시 신문에도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그것은 1920년대 진도에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의 지국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도의 첫 신문 지국은 1934년 박종협에 의해 중앙일보 지국이 설치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진도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세력이 얼마만큼 미약했는가를 보여준다.
진도의 민족운동, 특히 사회운동이 미약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타 지방보다 지주가 적고, 소작농보다는 자작농이 많았다는 것, 즉 계급간의 갈등이 그만큼 적었다는 것이 주요한 배경이 될 것이다. 또 신교육 기관이 취약했던 것도 그 배경의 하나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김흥수(2009) / 운요호사건과 이토 히로부미, 경인문화사
고영숙(1988) / 강화도조약의 성격과 영향에 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끼노시따따까오(2011) / 105인 사건과 청년학우회 연구, 숭실대학교
백승도(1986) / 임오군란에 관한 일고찰, 성균관대학교
정병준(2006) / 한국독립운동과 독립국가 건설의 역사적 의미, 문화체육관광부
한규무(2008) / 개항기 조선과 세계화 시대의 한국 : 역사적 조망,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그즈음 조선인 지주의 한 사람인 孫炳翼이 자기 소작인들이 소작료를 불납한다고 경찰에 신고하여 의신면 침계리 사는 조용근, 조용술 외 8명이 1월 22일 경찰에 호출되었다. 소작인들은 서장 이하 경찰들의 협박과 구타를 당하고 강제로 소작료를 납부하겠다는 승낙서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월 28일 경찰은 진도군 고군내면 소작간부 崔在汶과 郭文煥을 구금하였다. 그 이유는 이들이 소작회원들에 대해 지주들의 요구대로 소작료를 6,7할을 내고는 도저히 살 수 없으니 4할이 아니면 절대 내지 말라고 하였고 이를 위반한 회원들에게 벌금을 받았는데, 경찰은 이에 대해 공갈취재니 소요선동이니 하고 붙잡아다가 즉결심판으로 29일의 구금을 언도한 것이다.
지주측은 또 소작인들의 재산 차압을 단행하여 2월 6일 집달리 3명, 경관 3명, 지주단 일동 등이 의신면 침계리에 들러 소작인들의 가산 집기에 차압표를 붙여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고 한다. 2월 8일 소작회에서는 제2회 정기총회를 열었으나 돌연 경찰이 해산을 명하고 박순직(朴淳稷) 외 2명을 검속하였으며, 회원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경찰이 규칙 수정위원 소진호(蘇鎭浩)에게 규칙 수정 중에 소작료를 4할로 한 것을 5할로 하라고 명하자 소진호가 이를 끝내 거부하여 일어났다.
이 같은 지주와 소작인간의 갈등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 지주들은 1924년 12월초에 이미 공동징수의 기도를 포기하였다. 대신 지주들은 12월 17일 비밀리에 회의를 갖고 소작료 불납자에 대해서는 차압수속을 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지주회에 위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차압을 위해서는 차압적립금 6만원과 그 외의 여러 경비가 필요하였다. 이에 대지주들은 자신들의 경비 부담이 많아질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당시 대지주들은 비교적 소작인들에게 양보적인 태도를 취해왔기 때문에 중소지주에 비해 소작인들의 지주에 대한 반발은 강도가 약했다. 따라서 대지주들은 중소지주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자기가 보다 큰 경비를 부담한다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지주회에서 탈퇴를 희망하고, 또는 지주회의 해산을 주장하는 자까지 나오게 되어 지주회는 스스로 붕괴되는 형세가 되었다.
소작회는 2월 24일 다시 회의를 속개하여 경찰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회칙 수정안 등을 통과시켰는데, 그 내용은 1) 회장제도를 위원 제도로 변경하여 박인배(朴仁培) 외 19인을 선정함, 2) 논의 소작료는 5할로 하던 것을 4할 이내로 할 것, 다만 경작지 1평에 대해 총 수확고가 1되5홉 이상 되는 논은 소작료를 5할, 1되 5홉 이하 1되까지는 4할, 1되 이하 5홉까지는 3할, 5홉 이하는 2할씩을 지주에 납부할 것 등이었다. 진도 경찰이 이날 총회의 결의를 묵인한 것으로 보아 소작회의 이 같은 안은 아마도 지주측과의 일정한 타협 속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경찰과 군(郡)이 개입하여 지주에게는 강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소작인의 계급의식만을 치열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설득하고, 소작인에게는 투쟁을 계속한다면 장래 소작인에게 불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협박하여 소작료는 5할로 할 것, 다만 관습 또는 사정에 의해 그 이하로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조정을 하였다고 한다.
결국 이 소작쟁의는 지주측과 소작인측이 어느 쪽도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타협에 의해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소작쟁의를 지도한 이는 누구였을까. 그것은 소진호, 박종협, 박순직 등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진호는 진도소작쟁의를 1925년 1월에 개최된 전남해방운동자동맹 임시총회에 보고한 인물이다. 그는 이후 진도필연단의 조직을 주도하며, ML파로서 이후 신간회 광주지회에 참여하였다가 제34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또 1930년대 적색농민조합에 관여한 박종협(朴鍾浹)의 신문기록을 보면 박종협은 1924년 7월 진도소작인회를 조직하여 그 총무가 되었고, 소작쟁의를 지도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박종협도 이 쟁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이 쟁의와 관련하여 경찰에 의해 구속된 朴淳稷도 주요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1920년대 진도의 민족운동을 개관해 보았다. 1920년대 진도에서도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적 청년회, 사상단체, 소작인회, 진보적인 청년회 등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은 다른 군에 비해 매우 미약한 것이었으며, 신간회 지부 등은 결성의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같은 도서지방인 완도 등지와도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진도의 민족운동은 당시 신문에도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그것은 1920년대 진도에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의 지국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도의 첫 신문 지국은 1934년 박종협에 의해 중앙일보 지국이 설치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진도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세력이 얼마만큼 미약했는가를 보여준다.
진도의 민족운동, 특히 사회운동이 미약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타 지방보다 지주가 적고, 소작농보다는 자작농이 많았다는 것, 즉 계급간의 갈등이 그만큼 적었다는 것이 주요한 배경이 될 것이다. 또 신교육 기관이 취약했던 것도 그 배경의 하나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김흥수(2009) / 운요호사건과 이토 히로부미, 경인문화사
고영숙(1988) / 강화도조약의 성격과 영향에 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끼노시따따까오(2011) / 105인 사건과 청년학우회 연구, 숭실대학교
백승도(1986) / 임오군란에 관한 일고찰, 성균관대학교
정병준(2006) / 한국독립운동과 독립국가 건설의 역사적 의미, 문화체육관광부
한규무(2008) / 개항기 조선과 세계화 시대의 한국 : 역사적 조망,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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