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정책(무역정책)][한국 통상정책(무역정책)][미국 통상정책(무역정책)][중국 통상정책][일본]한국의 통상정책(무역정책), 미국의 통상정책(무역정책), 중국의 통상정책(무역정책), 일본의 통상정책(무역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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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통상정책(무역정책)][한국 통상정책(무역정책)][미국 통상정책(무역정책)][중국 통상정책][일본]한국의 통상정책(무역정책), 미국의 통상정책(무역정책), 중국의 통상정책(무역정책), 일본의 통상정책(무역정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한국의 통상정책(무역정책)
1. 해방이후~1961년(외국원조 의존경제)
2. 경제개발 초기
3. 수출주도 및 시장개방정책 초기
4. 산업별 투자조정시기
5. 본격적 시장개방추진기
6. 시장개방정책

Ⅲ. 미국의 통상정책(무역정책)

Ⅳ. 중국의 통상정책(무역정책)
1. 대외경제개방정책의 전개
1) 1980년대 이후의 개혁 ․ 개방
2) 1979-1983년
3) 1984-1988년
4) 1989-1991년
5) 1992년 이후
2. 개혁-개방 시기의 성장의 엔진
1) 비국유 주도의 외향적 경제발전전략
2) 향진기업의 발전
3) 대외지향적 경제주체의 발전

Ⅴ. 일본의 통상정책(무역정책)

참고문헌

본문내용

련되었다. 아시아 각국은 일본에 대해 AMF 내의 최대의 자금원으로서의 기대가 컸고, 일본도 자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독자의 금융ㆍ통화안정의 틀 구축실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등 역내에서 리더십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11월 하순에 열린 APEC 각료회의 직전 마닐라에서 일본, 미국, ASEAN 각국의 재무장관 대리회의가 열려 미국주도의 새로운 긴급융자제도의 창설문제가 협의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는 지속되었고, 게다가 중국도 그 구상에 대해 지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명하면서 AMF 구상은 실패하여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아시아 통화위기에 대해 새로운 기금은 설립하지 않으며 대신에 IMF를 보완하는 금융지원제도를 설치하는 것이 합의되었다. 이 마닐라 합의에 의해 AMF 창설의 꿈은 사라지고, 일본이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동아시아 구상은 좌절되었다.
AMF의 구상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중일과 ASEAN 국가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주의에서 그 역할을 점차 확대하고자 하였다. 일본의 AMF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단순히 구미의 지역주의에 대항 이라는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지역의 공통이익을 구체적으로 상정한 최초의 예로서 이는 그 후 급속히 동아시아국가간의 협력이 고조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이국간 지원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IMF의 경제긴축정책이 경제위기를 증폭시키면서 일본의 역할은 더욱더 활발해 지기 시작하였다.
우선 98년 10월에 일본정부가 정식 표명한 독자적인 금융지원 구상인 신미야자와(新宮澤)구상을 들 수 있다. 신미야자와구상에 대해서는 루빈 미재무장관도 ‘건설적인 대책’이라고 용인하였고, 이러한 일본의 적극적인 지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일본 정부도 엔 차관을 이용한 이국간 원조방식을 채택, 아시아로부터 자국을 배제된 다국간의 조직이 만들어 가는 것에 저항감이 강한 미국을 배려한 형태로 진행하였다.
둘째 1998년 이후의 엔 국제화정책은 일본 금융시장의 활성화를 모색하는 규제완화정책과 더불어 일본경제의 활성화와 아시아지원이라는 대외경제정책이라는 측면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일본 내 정치세력의 반응도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1997년까지 반대를 해 왔던 대장성은 1998년 4월 외환법 개정과 동시에 동경 금융시장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고, 1998년 7월에는 외국환율심의회의 ‘엔의 국제화 전문부회’를 대장성내에 설치하여 정부와 민간내의 논의를 활성화시켰다. 자민당도 금융문제조사회에서 ‘엔의 국제화에 관한 소위원회’를 설치하고, 동위원회는 98년 10월 엔의 매력을 고양시키기 위한 단기금융시장의 정비를 요구하는 제언을 발표하였다. 또한 민간부문에서도 1998년 6월 관서경제단체연합회, 경제단체연합회가 ‘엔의 국제화를 위한 금융시장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정부와 민간이 1980년대와 달리 엔의 이용촉진을 위한 엔 국제화 정책에 적극적이게 되었다.
셋째 ASEAN에 일본, 중국, 한국을 참가시키는 「ASEAN+3」이라는 포괄적 아시아 지역주의의 틀이 제도화 되어가고 있다. 이미 아시아유럽회의(ASEM)의 아시아측 준비모임으로서 1995년 11월에 각료급회의, 1996년 2월에 정상급회의가 개최되었지만, 그 당시의 회의들은 아시아로서 목표하는 공통의 아젠다를 명확히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1997년 12월에 「ASEAN+3」정상회담은 말레이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린 후 매년 개최되게 되었다.
이 「ASEAN+3」첫 정상회담에서 아시아 통화금융 안정을 위해 협조를 강화하자는 「마닐라 framework」를 도출함으로써 위기확대 방지를 위한 아시아 협력의 틀이 형성 되었다. 일본에서 볼 때 「ASEAN+3」의 협력의 틀은 경제위기로 타격을 받은 아시아로부터의 구체적인 지원책을 요구하는 장인 동시에 일본이 아시아 지원책을 발표하는 장으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98년 12월에는 제2회 「ASEAN+3」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99년 3월에는 하노이에서 「ASEAN+3」재무장관 대리ㆍ중앙은행총재 대리 회담이, 그 이듬해 4월에는 제1회「ASEAN+3」장상회담도 개최 되었다. 또한 11월 회의에서 오부치수상은 아시아 각국과의 종합적인 교류 책으로「인적 네트워크 구책을 위한 동아시아 인재 교류 플랜(오부치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제3회「ASEAN+3」재무장관ㆍ중앙은행 총재 대리 회담에서는 경제위기 재발방지를 위해 자금지원의 새로운 틀 만들기를 검토했고, 1999년 11월 마닐라「ASEAN+3」재무장관ㆍ중앙은행총재 대리 회의에서 제창한 경제 분야 지역지원 메커니즘에 대한 합의를 거쳐 아시아지역 통화기금 창설 가능성도 논의되었다. 그리고 2000년 5월 타이의 치앙마이에서 개최된 「ASEAN+3」제2회 재무장관회담에서 기존의 스왑 및 레포 계약 강화 등을 내용으로 한「치앙마이 이니셔티브」를 통한 통화ㆍ금융 분야의 여러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새로운 다국간의 금융기관을 창설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통화ㆍ금융 분야의 합의로서는 진일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ASEAN+3」의 지역주의는, EAEG구상과 다른 측면이 있다. EAEG 구상은 말레시아 마하티르 수상이 미국에 대한 견제와 아시아 국가들 간의 공동체간의 배타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 이에 비해 「ASEAN+3」은 금융위기에 따른 경제 회복과 위기 극복을 그 목표로 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일본은 양쪽 성격이 다름을 강하게 자각하고 위기 후의 「ASEAN+3」이라는 포괄적 지역주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박태진(2000), 미국의 통상정책과 경상수지 불균형, 한국기업경영학회
- 이기완(2010), 일본의 통상정책 변화와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고려대학교 일민국제- 조영종(2010), 한국의 통상정책과 국회 역할, 연세대학교
- 장춘녀(2010), 한국과 중국의 통상정책에 관한 비교연구, 성균관대학교
- 정하(2008), 중국의 통상정책 전환에 관한 연구, 인하대학교
관계연구원
- 최승현(2006), 미국의 통상정책에 관한 한국의 대응방안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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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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