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정,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인식,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 대한민국임시정부 정당통일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애국금제도, 대한민국임시정부 모스크바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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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정,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인식,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 대한민국임시정부 정당통일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애국금제도, 대한민국임시정부 모스크바자금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정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인식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통국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당통일운동
1. 만주사변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2. 정당통일운동 세력 대(對) 임시정부 옹호세력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애국금제도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모스크바자금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1920년 가을 한인사회당의 박진순과 한형권이 이미 떠난 후, 제2인터내셔날에 가입한 바 있으나 국제공산당에 가입하고자 모스크바에 온 또 다른 ‘한인사회당’의 대표 조소앙에 관한 에피소드이다. ‘한인사회당’은 국제공산당 문헌에 ‘한살림당’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어쨋든 이 당은 1920년 1월 25일에 상해에서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당헌을 채택한 것으로 되어 있고 영어로 “Korean Socialist Party”라 하고 우리말로는 ‘한인사회당’이라 하여 강령과 규약을 준비해왔던 것이다. 당시 모스크바에서 조소앙을 만난 바 있는 한인사회당 간부 이인섭은 조소앙의 ‘한인사회당’이 경기 장단 출신으로 한인사회당 간부인 장기영을 총무로 선정해 놓고 있어 매우 의아해 했다고 한다. 국제공산당 가입을 타진한 ‘한살림당’에 관하여는 일찍이 국제공산당 문헌들을 검토한 바 있는 일본인 학자인 미즈노(水野直樹)가 그 뜻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장도정, 김진 등이 조직한 일세당으로 잘못 추정한 바 있다. 물론 ‘한살림당’은 1917년 8월 상해에서 신규식 등이 조직한 ‘조선사회당’에도 연결되고, 직접적으로는 제2인터내셔날에서의 조소앙의 외교활동을 후원하기 위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이순기, 이살음 등 이승만계 인물들이 조직한 노동사회개진당을 말하는 것이다. 한살림당은 제2인터내셔날에 가입했으나 탈퇴하였음을 강조하면서 국제공산당에의 가입을 신청하였던 것인데, 국제공산당은 1920년 11월 11일의 집행위원회에서 이미 국제공산당에 가입한 한인사회당과의 합동을 권유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3차자금 20만 달러 한형권이 소련정부 외무인민위원장 치체린과 교섭하여 결렬된 임시정부의 “내부 정리”를 위한 운동비로 받아낸 것으로 당초 약속했던 200만 루블의 일부이다. 한형권은 국민의회의 파리강화회의대표였던 고창일의 협력을 받아 독일의 베르린 주재 소련대사관을 통하여 자금을 확보하고 유럽을 거쳐 상해로 돌아왔으니 1921년 11월경의 일이다. 한형권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여러 세력들의 각축은 치열했다. 상해파 역시 옛 한인사회당원인 한형권이 자파에게 자금을 내놓을 것을 바랬다. 임시정부는 앞서의 40만루블은 이미 소진되었으니, 새로 가져온 20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임시정부에도 고려공산당에도 자금을 내놓을 수 없게 된 어려운 처지에 빠진 한형권은 결국 자금을 함께 운반한 고창일 및 윤해 등 국민의회 인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에 자금을 쓰도록 했다. 임정측은 모스크바자금의 책임자로 알려진 김립과 한형권이 자금을 내놓게 하기 위하여 테러단을 조직하였다. 이와 함께 상해임정는 1922년 1월 26일자로 이동휘와 김립에 대한 성토문을 냈고, 김상옥을 시켜 윤해의 암살을 시도했으며, 마침내는 김립을 암살하였다.
여기에서 덧붙일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상해, 이르쿠츠크 양파 고려공산당이 나머지 국제공산당자금 140만 루블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상해임정측이 뛰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즉, 상해임정은 1921년 중반 모스크바자금을 획득하기 위하여 외무차장 이희경을 주러시아 대사로서 안공근과 함께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비에트정부가 당초 상해임정에 약속했던 차관의 나머지 160만 루블의 확보를 위한 3파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상해임정은 국무회의를 열고 이동휘가 파견하였던 한형권의 즉각적인 소환을 결의하였다.
Ⅸ. 결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공포한 이후 다섯 차례의 개헌을 단행했다. 각각의 임시헌법은 그 제정자 및 개정자들이 처한 객관적 조건과 그들의 정치이념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임시정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특히 임시정부의 지도체제는 임시헌법 개편의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1927년 3월 제3차 개헌을 통해 채택된 국무위원회제는 1940년 10월 제4차 개헌을 단행할 때까지 임정의 지도체제로 운영되었다. 국무위원회제 시기 민족운동전선에서는 민족유일당운동과 독립운동정당 통합운동 등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국무위원회제의 내용과 성격을 토대로 임시정부가 민족운동전선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임시정부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임정의 헌법체계와 지도체제는 주요한 연구대상의 하나였다. 임정의 지도체제는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한 이후 임시헌장과 국무총리제, 제1차 개헌과 대통령제, 제2차 개헌과 국무령제, 제3차 개헌과 국무위원회제, 제4차 개헌과 주석제, 제5차 개헌과 주석부주석제 등으로 변천되었다. 그 가운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독립운동사제4권(임시정부사)는 1차 사료를 활용하여 임시정부 조직체제의 변천과 활동상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간 국무위원회제를 채택한 제3차 임시약헌의 전문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무위원회제의 조직적 특성을 분명히 밝히기는 어려웠다. 그 후 제3차 대한민국임시약헌의 전문이 공개됨으로써 국무위원회제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제3차 개헌의 배경과 그 의미 및 이 시기 임시의정원의 위상을 다룬 연구가 나왔으나, 국무위원회제의 조직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임정의 국무위원회제 지도체제는 그 존속 기간이 가장 길었고 ‘상해사변’과 尹奉吉의거 이후 임정은 근거지를 자주 이동했다. 따라서 그 변천 과정은 당시의 국제정세민족운동전선과의 유기적 연관 속에서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국무위원회제 시기에 그것이 갖는 의미성격을 올바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과 그 이념, 삼균학회, 2006
김영수, 대한민국 임시정부헌법과 그 정통성, 한국헌법학회, 1995
이연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적 위상,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99
이연복,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그 변천, 경희대학교사학회, 1982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 삼균학회, 2006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기념일, 바로잡아야, 한국근현대사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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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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