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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립운동가 이봉창 열사(의사), 독립운동가 매천 황현 열사,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의사,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 독립운동가 해도 송내호, 독립운동가 철기 이범석, 독립운동가 이은찬 의병대장, 김일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독립운동가 이봉창 열사(의사)

Ⅱ. 독립운동가 매천 황현 열사

Ⅲ.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의사

Ⅳ.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

Ⅴ. 독립운동가 해도 송내호

Ⅵ. 독립운동가 철기 이범석

Ⅶ. 독립운동가 이은찬 의병대장

Ⅷ. 독립운동가 김일성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다가 대규모 전투 수행시 상호 연합작전을 구사하였다. 1908년 10월 19일 이은찬 등은 의병 50여명을 거느리고 포천군 송우리에 나타나 “본 수확기를 이용하여 군용금을 징발하는데 대하여 신곡의 수출을 금한다”는 방곡령을 선초함과 동시에 “포천군에 있어서의 각 관아를 전멸하고 우리 의군의 기세를 울리려고 한다.”고 포고 하였다. 이에 일본군측은 이들 의병을 이은찬이 새로 조직한 의병진영으로 파악하고 엄중 경계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이은찬의 부대나 경기북부 연합의병들은 1908년 10월경 동절기에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의병들은 여름철복장을 착용하고 있어 추위에 고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산악전투에 필요한 의복, 식량, 무기 등을 구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할 과제였다. 이러한 수요의 필요조건으로 추수기를 즈음한 10월부터는 의병부대의 투쟁양상이 군량미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이들의 군량미 확보는 군량미 확보라는 목적도 있었으나 일제의 미곡 수탈방지라는 또 다른 목적도 있었다. 이들 의병들은 준자금이나 군량미를 모금할 때 반드시 군표를 발행하여 후일 갚도록 하는 등의 행동으로 의병의 원동력이 백성에게 있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하였다. 이 같은 민심을 바탕으로 12월에 들어서자, 이은찬은 일본군을 상대로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하였다. 이은찬 등의 의병들은 1908년 11월부터 약 3개월간 포천, 양주산악을 배경으로 줄기찬 활동을 벌였으나 2월 상순경에 이르러 연일 계속되다시피한 전투로 인한 군량미, 탄약의 결핍, 부상과 사망들 의병진영내에 약간의 동요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에 이은찬 등의 의병장들은 당분간 부대를 수습정비하기 위하여 영평, 양주 방면으로 분산 활동한 후 2월 21일경 양주에서 다시 합류하기로 한다.
이은찬부대의 의병활동은 다른 자료에 나타나 있듯이 다양하고, 뛰어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전투력이나 지휘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싸움을 할 수 있는 장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은찬 의병 부대 역시 자금 부족으로 인하여 쫓기게 되고 이은찬 자신도 군자금 확보를 위해 노력하다가 이러한 계획을 눈치 챈 박노천신좌균 등의 의병활동비를 제공하겠다는 유인에 속아 서울에 들어왔다가 함정에 빠져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게 된다.
一枝李樹作爲船(일지이수작위선) 오얏나무 가지 하나로 배를 만들어
欲濟蒼生泊海邊(욕제창생박해변) 백성을 건지고자 해변에 뛰었는데
寸功未就身先?(촌공미취신선?) 조그만 공도 이루지 못하고 내 몸 먼저 빠지니
?算東洋樂萬年(?산동양락만년) 누가 동양의 만년을 기약하리오.
위 시는 이은찬이 마지막 남기고 간 시이다. 그는 1909년 5월 10일 교수형을 선고받아 6월 27일 순국하였다. 그러나 이은찬의 이러한 기상은 강기동박순근정용대 등에게 이어져 우리나라 의병이 재차 기의하는 효과를 낳았다.
Ⅷ. 독립운동가 김일성
항일투쟁 당시 백마를 타고 만주벌판을 주름잡으며 일본군을 무찌르던 김일성이라는 전설적 명장이 존재했었다. 하여 만주 근방에서는 자식을 낳으면 김일성과 같은 인물이 되라고 덕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이북의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며, 이북의 김일성은 전설적 명장 ‘김일성 장군’의 업적과 이름을 가로챈 민족반역자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의 김일성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북의 김일성이란 인물의 실체는 무엇이며 이런 김일성가짜 설은 어디로부터 나왔고 왜 발생하였는가?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만경대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본명은 김성주이다. 혁명적 가정의 영향으로 김일성은 일찍부터 반일활동에 참가하게 되었고 1927~29년에 공산주의 청년 활동과 반동군벌교원 반대투쟁, 반일투쟁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29년 중국군벌에 체포돼 길림감옥에 투옥 되었다. 이듬해 출옥한 김일성은 학업을 중단하고 본격적인 항일투쟁의 길에 들어선다. 그 이후 동만주로 주무대를 옮겨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대중사업에 참여하였으며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1937년에는 보천보를 침투하여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등의 관공서를 기습하고, 민중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고취시키는 등 실질적 항일투쟁을 수행하였다.
문헌상으로 가장 먼저 이북의 김일성가짜 설을 주장한 사람은 1945년에 간행된 <해방전후의 조선진상>이란 책의 공저자인 김종범과 김동운이다. 김종범은 일제 강점기에는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북풍회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나, 해방 뒤에는 한민당의 간부가 된 인물이고 김동운은 만주 일본영사관 소속의 고등계 형사였다. 또한 1950년 <김일성 위조사>란 책을 펴낸 이북(李北)은 일제 시기 도쿄에서 아세아민족연구소라는 친일단체를 운영하였으며, 해방 뒤에는 공산주의타도동지회 회장, 반공교육신문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이와 같이 이북의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유포한 사람들은 친일파나 일제의 고등계 형사 출신, 또는 한민당과 같은 우익단체의 간부들이었다. 결국 이 가짜 설의 주창자들은 김일성이 민족적 항일영웅으로 존경 받으면 받을수록 그들의 입지가 곤란해지는 반민족행위자들이 대부분 이었다. 특히 가짜 김일성 설의 고전적 문헌인 이북의 <김일성 위조사>나 오영진의 <하나의 증언>이 한국전쟁 시기에 제작, 배포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결국 해방이후 이승만 정권과 그 배후 세력들이 그들의 정치적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상당부분 날조하였던 것이다. 물론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북측에 의해 실질적으로 과장된 부분도 있겠으나 정당하게 김일성에 대해서, 재평가 되어야 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참고문헌
1. 김강녕, 제2장 윤봉길의 민족사상과 정치적 함의, 한국민족사상학회, 2008
2. 나현곤, 철기 이범석 장군과 한·미 연합작전, 조선대학교 군사학연구소, 2011
3. 박진태, 한말 포천지역 의병활동과 이은찬, 대진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7
4. 심영의, 황현 연구, 전남대학교 한국어문학연구소, 2008
5. 이승현, 신민회 시기 안창호의 구국운동 구상, 도산학회, 2010
6. 한시준, 이봉창 의사의 일왕저격의거, 한국역사연구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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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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