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 윤봉길의사, 의열투쟁, 훙커우공원사건(루쉰공원사건)]매헌 윤봉길의사의 생애, 매헌 윤봉길의사의 의열투쟁, 매헌 윤봉길의사의 훙커우공원사건(루쉰공원사건, 홍구공원사건), 매헌 윤봉길의사의 기념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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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매헌 윤봉길의사, 의열투쟁, 훙커우공원사건(루쉰공원사건)]매헌 윤봉길의사의 생애, 매헌 윤봉길의사의 의열투쟁, 매헌 윤봉길의사의 훙커우공원사건(루쉰공원사건, 홍구공원사건), 매헌 윤봉길의사의 기념활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매헌 윤봉길의사의 생애

Ⅲ. 매헌 윤봉길의사의 의열투쟁

Ⅳ. 매헌 윤봉길의사의 훙커우공원사건(루쉰공원사건, 홍구공원사건)

Ⅴ. 매헌 윤봉길의사의 기념활동
1. 광현당
2. 저한당
3. 부흥원

Ⅵ.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日本侵略軍 總司令部의 총사령관 이하 단상에 앉아 있던 軍政 수뇌 7명이 모두 섬멸 당한 것이었다.
윤봉길은 이어서 다음 도시락형 폭탄을 들려고 구부리는 순간에 일본 경비원과 일본 군경에게 덮치어 군화몽둥이로 잔혹하게 구타당해서, 두 번이나 기절상태로 쓰러졌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끌려 나왔는데, “그는 머리에서부터 소매까지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으며, 심지어 소매에서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계속 싱긋 웃고 있었다”고 목격한 현장 기자들이 보도하였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게 구타당해 피범벅이 된 상태에서도 그의 독립운동 특공작전의 대성공에 계속 환희의 미소를 보인 것이다.
일제는 윤봉길의 特攻作戰에 실로 심대한 타격을 입자,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이 총출동하여 프랑스 조계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닥치는 대로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사건이 사건인 만큼 프랑스 경찰도 이번에는 이를 막지 못하였다. 金九는 윤봉길의 특공작전에 관계없는 동포들이 일제에 체포당하는 것을 염려하여 윤봉길의 배후는 金九와 韓人愛國團임을 밝히는 성명서를 중국의 각 신문사에 돌리었다.
윤봉길은 1932년 5월 25일 일본 상해파견군 군법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11월 18일 삼엄한 경비 속에 일본으로 호송되어 오오사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에 이감되었으며, 이튿날 1932년 12월19일 아침 7시 30분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三小牛) 工兵작업장에서 일본군의 총살형 집행으로 25세의 젊은 나이에 殉國하였다.
Ⅴ. 매헌 윤봉길의사의 기념활동
윤봉길의사의 위업을 기리고자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유적은 1965년 고택후원에 기념탑이 건립되었고 1968년 충의사가 창건되었고, 1972년에는 윤의사의 생가와 고택 및 충의사 전역이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었으며, 예산군에서는 매년 4월 29일 매헌문화제를 열어 윤의사를 추모하고 있다.
1. 광현당
광현당은 윤의사의 생가이다. 이곳에는 연자매와 물레방아 등이 복원되어 있다. 이 집에서 윤봉길은 윤황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4세 때까지 살았다. 이것은 냇물의 한가운데에 있는 일종의 삼각주로서 사방으로 냇물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윤봉길은 한반도의 가운에 섬이라는 뜻인 도중도라 불렀다.
2. 저한당
저한당은 윤봉길 의사가 성장했던 곳이다. 상해로 망명하기 전까지 민족운동을 펴던 곳이고, 윤의사의 거사 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왜경들의 탄압과 감시 속에서 시달리던 집이기도 하다. 생가를 비롯한 이 일대는 윤봉길 의사의 유적지로서 이 집에서 계속 살았다. 이곳에는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탑과 두루마기 입은 윤의사의 동상이 서 있다.
3. 부흥원
부흥원은 윤봉길이 19세 때인 1926년에 창설하여 야학회, 독서회, 월진회 등 농촌계몽운동을 펴던 집이다. 저한당, 광현당, 부흥원은 모두 규모가 크지 않은 전형적인 농촌의 초가집 형태다.
Ⅵ. 결론
일본인 식민자사회는 조선만주의 그 어느 것이나 극단적인 관존민비의 사회였고 군인과 관료의 천하였다. 이들을 둘러싸고 독점기업 사원들과 상인들, 온갖 비생산적 노동자 대군이 존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어디에도 일본인 거지는 없었다. 식민지 1세가 2세가 되고 3세가 된 조선에서의 일본인 식민자들은 차츰 권력과 영광을 잃어가고는 있었으나 마차꾼이나 짐꾼 따위의 육체노동자는 없었고, 따라서 압박받는 \"계급\"이라는 생각은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식민지 1세들에게 식민지는 거기서 얻은 부(富)를 고향으로 가져가기 위해 마련된 땅을 의미했을 것이다. 해외로 나온 일본이민은 어디서나 일본 본국의 연장선상에서 돈벌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민들이 얼마만큼의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면 고향사람들이 그 돈에 대해 경의를 표하면서도 타향에서의 생활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마음 깊은 곳에 모멸감을 품었고, 따라서 그들은 본국인에게서 멸시당함을 면할 수가 없었다.
조선만주의 일본인 식민자는 도시생활자와 농촌생활자의 두 부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관료와 회사원, 상인 등 도시생활자는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지방도시에서 지내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얼핏 스마트한 신사였으나 그들의 대부분은 그곳 풍물이나 사람들과 익숙해지거나 정을 붙이지 못하고 그것들에 대한 단순한 지식조차도 갖추지 못했다. 농촌생활자의 경우, 조선에서는 교원과 순경, 영세상인, 우체국금융조합의 직원 등과 그 가족이 주위의 조선인과 다소의 접촉을 유지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집단이주한 개척농민과 그 가족들이 그들이 고용한 사역꾼인 중국인조선인들과 일정한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그러한 무명 식민자인 일본인들의 눈에는 피식민자인 조선인중국인의 일들은 거의 묵살되었다.
식민자의 살림살이는 대체로 넉넉했고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그 반대로 식민자에게는 식민지란 언제나 가난한 땅이었고 피식민자는 늘 불결하였다.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문제이기보다는 모든 식민자가 그 땅에 상륙했을 때 벌써 그러한 것들이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하고, 식민자가 그곳에서 지배를 계속하는 동안에 빈곤이나 비참함을 발견하여도 그런 것들이 식민지지배로 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단 한번도 가져보는 일 없이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군인들은 총검으로 임산부의 배를 찌르고, 포로의 목을 쳐서 땅에 떨어뜨리는 일에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았다. 조선의 산간지방에 살면서 봉급이 싸다고 푸념하면서도 식민자의 주부들은 힘든 가사일을 위해 조선인 가정부를 싼값에 부려먹으면서 쾌감과 허영을 누렸다. 거기에는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관철되었고, 피식민지인은 철저하게 피동적인 피통치자로밖에 파악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김학준, 매헌 윤봉길, 동아일보사, 2008
* 김강녕, 윤봉길의 민족사상과 상해의거, 이경, 2008
* 방영웅, 불꽃이 된 청년 윤봉길, 창비, 2006
* 방영웅, 윤봉길 의사, 창작과비평사, 1983
* 송종호, 불멸의 겨레 사랑 윤봉길, 지경사, 2006
* 임중빈, 윤봉길 의사 일대기, 범우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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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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