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신라의 왕권(신문왕)
Ⅲ. 신라의 왕권강화
Ⅳ. 조선의 왕권(태조)
1. 이거이․이저세력의 제거
2. 이무의 제거
Ⅴ. 조선의 왕권약화
1. 왕실의 구성과 왕위 승계 과정
2. 왕위의 위상 변동
참고문헌
Ⅱ. 신라의 왕권(신문왕)
Ⅲ. 신라의 왕권강화
Ⅳ. 조선의 왕권(태조)
1. 이거이․이저세력의 제거
2. 이무의 제거
Ⅴ. 조선의 왕권약화
1. 왕실의 구성과 왕위 승계 과정
2. 왕위의 위상 변동
참고문헌
본문내용
왕들의 정치적 위상을 낮게 만드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순조는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 승계 후보자로서 준비를 하던 중 정조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 준비를 다하지 못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바로 신료들의 청에 따라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도록 결장되었고, 최고 권력의 대부분을 정순왕후가 장악하고 순조는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수렴청정이 끝난 이후 순조는 국정을 전반적으로 파악하고 위상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이러한 시도는 몇몇 유력 가문으로 정치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그들을 견제하면서 왕권의 행사를 뒷받침할 만한 관료 집단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성공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시도가 좌절된 후 순조는 정치적 비중이라는 측면에서는 극히 미미한 존재로 머물고 있다.
헌종은 네 살 되던 해인 1830년에 아버지 효명세자가 갑자기 죽음으로써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여덟 살에 즉위하면서 관례를 행하고, 재위 3년에 혼인을 하였다. 현종의 정치적 역량이 지극히 미숙하여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왕으로서 헌종의 권한은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조에서 정조, 순조에서 헌종처럼 대를 뛰어넘어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왕위가 이어지는 것 자체는 왕위 승계자로서 정통성에 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러 면에서 실질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자질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왕위를 이어받는 점이 왕권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왕의 직계가 끊어져 왕실 방계의 인물을 맞아들여 왕위를 잇는 경우는 왕위 승계자로서 정통성부터 문제가 된다. 19세기 후반 왕위에 오른 철종과 고종이 이에 해당되는 왕들이다. 철종과 고종의 가계는 왕실의 직계가 아니며, 따라서 그 혈연 관계와 왕위 승계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철종은 사도세자와 양제 임씨 사이의 소생인 은언군 인의 손자이다. 그런데 사도세자-언군-에서 전계군-철종으로 이어지는 가계는 영조 연간부터 철종 즉위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파란 만장한 곡절을 겪었다. 이러한 처지의 철종을 헌종의 뒤를 이을 왕으로 결정한 사람은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이다. 순원왕후가 철종을 결정할 때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영조의 유일한 혈맥이라는 점이었으나 그 논거는 설득력이 약한 것이었다.
철종을 영조의 유일한 혈맥이기 때문에 왕으로 결정하였다기 보다는 입지가 취약한 인물을 왕으로 정함으로써 순원왕후 자신과 자신의 친정인 당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 김씨 가문의 지위를 공고히 유지하려는 의도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철종은 왕위 후계자의 자리-世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당시 기준으로 나이는 어른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학문적정신적 수준에서는 아직 미성년이라고 해야 할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철종을 순원왕후가 선택해서 왕위에 오르게 했다는 사실은 철종이 왕으로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렵게 하는 중요한 한 원인이 되었다.철종의 재위 거의 대부분의 기간동안 안동 김씨 가문이 정치권력의 핵심을 장악하였고, 철종은 결국 왕실 조상의 묘소나 사당에 제사지내는 등의 典禮 행위 외에 왕으로서 이렇다 할만한 정치적 역할을 해보지 못하였다.
고종은 왕위 승계자로서 정통성에 철종보다도 더 많은 문제를 갖고 왕위에 올랐다. 고종의 가계는 사도세자-은신군-남연군-흥선 대원군-고종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남연군은 은신군의 친아들이 아닌 입적된 인물이며 그는 본래 왕실의 종친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던 사람이다. 흥선군등은 종친으로서의 지위는 유지하고 있었으나, 드러날만한 활동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남연군의 손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命福(고종)을 왕으로 정한 사람은 철종 말년 당시 대왕대비였던 익종비 신정왕후이다. 철종이 죽은 당일에 전격적으로 왕위에 오른 고종은 아직 나이가 어릴 뿐만 아니라 학문 능력이나 정세 판단 능력에서 미숙한 미성년이었다. 그러므로 즉위 초년에 고종은 신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하에서 왕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은 거의 찾지 못하였다.
고종이 왕으로 결정되는 과정은 철종이 왕으로 결정되는 과정과 유사하면서도, 왕위 승계의 정통성이라는 점에서는 그보다 더욱 약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철종의 경우는 겉으로나마 영조의 유일한 혈맥이라는 점을 내세웠으나 고종을 세울 때는 선택의 근거를 공개적으로 내세우지도 않았다. 풍양 조씨 조만영 가문 출신의 신정왕후는 안동 김씨 김조순 가문 출신의 순원왕후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내용상으로는 더욱 자의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왕위의 승계는 공적인 성격이 줄고 대왕대비의 개인적 결정에 의존하는 모습을 더욱 강하게 띠게 되었다.
2. 왕위의 위상 변동
19세기 왕위 승계 과정의 기본적 특징은 왕조 사회의 일반적 왕위 승계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적장자 상속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그 유형은 첫째, 순조에서 헌종으로 이어진 경우처럼 대를 뛰어 넘어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왕위가 이어지는 형태와 둘째, 헌종에서 철종, 철종에서 고종으로 이어진 경우처럼 왕의 직계처럼 왕의 직계가 끊어져 먼 종실의 인물을 맞아들여 왕위를 잇는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왕위에 오른 왕들은 순조를 빼면 모두 왕위 승계의 정통성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셈이다. 왕위 승계 과정상의 이러한 문제들은 19세기 왕들의 정치적 위상을 낮게 만드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왕으로서 그들의 권한도 점점 작아져 갔으며, 왕들은 실질적 권력행사에서 배제된 채 전례 행사만이 잦아졌다.
참고문헌
○ 김희만(2010), 신라 왕권체제의 성립과 운영, 동국대학교사학회
○ 박해현(1996), 신라 중대의 성립과 신문왕의 왕권 강화,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 이광종 외 1명(1990), 조선시대 왕권과 신권간의 상호견제작용에 관한 연구, 청주대학교행정문제연구소
○ 진희권(2008), 조선에서 왕권과 역사기록, 경기대학교 법학연구소
○ 최승희(1987), 조선 태조의(太祖) 왕권과 정치운영, 진단학회
○ Pankaj Mohan 외 1명(2007), 7세기 초 신라왕권의 강화와 불교, 신라사학회
순조는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 승계 후보자로서 준비를 하던 중 정조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 준비를 다하지 못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바로 신료들의 청에 따라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도록 결장되었고, 최고 권력의 대부분을 정순왕후가 장악하고 순조는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수렴청정이 끝난 이후 순조는 국정을 전반적으로 파악하고 위상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이러한 시도는 몇몇 유력 가문으로 정치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그들을 견제하면서 왕권의 행사를 뒷받침할 만한 관료 집단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성공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시도가 좌절된 후 순조는 정치적 비중이라는 측면에서는 극히 미미한 존재로 머물고 있다.
헌종은 네 살 되던 해인 1830년에 아버지 효명세자가 갑자기 죽음으로써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여덟 살에 즉위하면서 관례를 행하고, 재위 3년에 혼인을 하였다. 현종의 정치적 역량이 지극히 미숙하여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왕으로서 헌종의 권한은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조에서 정조, 순조에서 헌종처럼 대를 뛰어넘어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왕위가 이어지는 것 자체는 왕위 승계자로서 정통성에 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러 면에서 실질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자질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왕위를 이어받는 점이 왕권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왕의 직계가 끊어져 왕실 방계의 인물을 맞아들여 왕위를 잇는 경우는 왕위 승계자로서 정통성부터 문제가 된다. 19세기 후반 왕위에 오른 철종과 고종이 이에 해당되는 왕들이다. 철종과 고종의 가계는 왕실의 직계가 아니며, 따라서 그 혈연 관계와 왕위 승계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철종은 사도세자와 양제 임씨 사이의 소생인 은언군 인의 손자이다. 그런데 사도세자-언군-에서 전계군-철종으로 이어지는 가계는 영조 연간부터 철종 즉위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파란 만장한 곡절을 겪었다. 이러한 처지의 철종을 헌종의 뒤를 이을 왕으로 결정한 사람은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이다. 순원왕후가 철종을 결정할 때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영조의 유일한 혈맥이라는 점이었으나 그 논거는 설득력이 약한 것이었다.
철종을 영조의 유일한 혈맥이기 때문에 왕으로 결정하였다기 보다는 입지가 취약한 인물을 왕으로 정함으로써 순원왕후 자신과 자신의 친정인 당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 김씨 가문의 지위를 공고히 유지하려는 의도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철종은 왕위 후계자의 자리-世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당시 기준으로 나이는 어른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학문적정신적 수준에서는 아직 미성년이라고 해야 할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철종을 순원왕후가 선택해서 왕위에 오르게 했다는 사실은 철종이 왕으로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렵게 하는 중요한 한 원인이 되었다.철종의 재위 거의 대부분의 기간동안 안동 김씨 가문이 정치권력의 핵심을 장악하였고, 철종은 결국 왕실 조상의 묘소나 사당에 제사지내는 등의 典禮 행위 외에 왕으로서 이렇다 할만한 정치적 역할을 해보지 못하였다.
고종은 왕위 승계자로서 정통성에 철종보다도 더 많은 문제를 갖고 왕위에 올랐다. 고종의 가계는 사도세자-은신군-남연군-흥선 대원군-고종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남연군은 은신군의 친아들이 아닌 입적된 인물이며 그는 본래 왕실의 종친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던 사람이다. 흥선군등은 종친으로서의 지위는 유지하고 있었으나, 드러날만한 활동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남연군의 손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命福(고종)을 왕으로 정한 사람은 철종 말년 당시 대왕대비였던 익종비 신정왕후이다. 철종이 죽은 당일에 전격적으로 왕위에 오른 고종은 아직 나이가 어릴 뿐만 아니라 학문 능력이나 정세 판단 능력에서 미숙한 미성년이었다. 그러므로 즉위 초년에 고종은 신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하에서 왕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은 거의 찾지 못하였다.
고종이 왕으로 결정되는 과정은 철종이 왕으로 결정되는 과정과 유사하면서도, 왕위 승계의 정통성이라는 점에서는 그보다 더욱 약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철종의 경우는 겉으로나마 영조의 유일한 혈맥이라는 점을 내세웠으나 고종을 세울 때는 선택의 근거를 공개적으로 내세우지도 않았다. 풍양 조씨 조만영 가문 출신의 신정왕후는 안동 김씨 김조순 가문 출신의 순원왕후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내용상으로는 더욱 자의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왕위의 승계는 공적인 성격이 줄고 대왕대비의 개인적 결정에 의존하는 모습을 더욱 강하게 띠게 되었다.
2. 왕위의 위상 변동
19세기 왕위 승계 과정의 기본적 특징은 왕조 사회의 일반적 왕위 승계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적장자 상속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그 유형은 첫째, 순조에서 헌종으로 이어진 경우처럼 대를 뛰어 넘어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왕위가 이어지는 형태와 둘째, 헌종에서 철종, 철종에서 고종으로 이어진 경우처럼 왕의 직계처럼 왕의 직계가 끊어져 먼 종실의 인물을 맞아들여 왕위를 잇는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왕위에 오른 왕들은 순조를 빼면 모두 왕위 승계의 정통성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셈이다. 왕위 승계 과정상의 이러한 문제들은 19세기 왕들의 정치적 위상을 낮게 만드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왕으로서 그들의 권한도 점점 작아져 갔으며, 왕들은 실질적 권력행사에서 배제된 채 전례 행사만이 잦아졌다.
참고문헌
○ 김희만(2010), 신라 왕권체제의 성립과 운영, 동국대학교사학회
○ 박해현(1996), 신라 중대의 성립과 신문왕의 왕권 강화,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 이광종 외 1명(1990), 조선시대 왕권과 신권간의 상호견제작용에 관한 연구, 청주대학교행정문제연구소
○ 진희권(2008), 조선에서 왕권과 역사기록, 경기대학교 법학연구소
○ 최승희(1987), 조선 태조의(太祖) 왕권과 정치운영, 진단학회
○ Pankaj Mohan 외 1명(2007), 7세기 초 신라왕권의 강화와 불교, 신라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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