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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여성단체의 정의

Ⅲ. 여성단체와 여성정책
1. 아동보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정부 지원 영아보육을 늘리고, 보육교사의 자격증 제도 도입, 방과 후 아동보육을 활성화하기 위해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1) 정책과제
2) 현황
2. 저소득 한부모의 경제적 자립 지원 및 미혼부모를 위한 지원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1) 정책과제
2) 현황
3. 여성노인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지원대책, 의료 및 재가복지 지원프로그램을 강화해야 한다
1) 정책과제
2) 현황
4. 양성평등의식을 확산하기 위해 인성교육 차원에서 사회교육, 학교교육 등에 여성학과 성교육을 정규과목으로 채택하고 여성에 대한 평생교육을 지원해야 한다
1) 정책과제
2) 현황

Ⅳ. 여성단체와 여성정보화
1. 여성정보화의 정의
2. 정부의 여성관련 정보화정책 만족도

Ⅴ. 여성단체와 사회주의계 여성단체운동
1.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 조선여성동우회
2. 사회주의계 여성단체의 분열
3. 사회주의계 여성단체의 재통합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론적 기반을 쌓고 1926년 봄에 귀국하였다. 黃信德은 平壤 숭의여학교 졸업 후 東京 日本女子大學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흥미를 갖고 三月會 등에 관련하였으며 1926년 봄 귀국 후 곧 여성동우회에 가입하였고, 시대일보 기자로도 활약하였다. 李賢卿도 황신덕과 같이 동경일본여자대학 사회과 출신으로 丁七星과 三月會를 조직 활약하였다. 귀국 후 여성동우회에 가입 활약하였으며, 「經濟狀態의 變遷과 女性의 地位」에서 사회주의 여성운도의 이론과 그 사상을 제시한 이론가이자 실천가이다. 姜아그니아는 露嶺 출신으로 귀국 후 여성 동우회에 가입, 남편 鄭弼元과 더불어 사회주의운동에 힘 썼으며 일제에 의한 공산주의 일제 검거시에 피검되어 囹圄의 생활을 한 여성이다.
이들 새로운 인물들은 여성동우회 활성화와 더불어 분파된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동합화에 노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926년 11월 14일, 경성여자청년회에서 재경(사회주의) 부인운동자 간친회를 열었는데, 朝鮮日報는 “막혔던 장벽을 트고 가렸던 흉금을 헤치고 지금까지의 여성운동의 소감을 말하여 종합한 결과 전 조선여성운동자의 통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깊이 느끼고 먼저 경성여자청년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을 합동키로 결의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두 단체는 여성동우회에서 분파된 것이므로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통일 도모에서 이 두 단체의 합동이 선행되어야 함은 상식적인 것이다. 동 간친회에서 양 단체의 합동총회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으로 조선여성동우회의 이현경, 황신덕, 강아그니아 3인, 경성여자청년동맹의 조원숙, 심은숙, 김정은 3인 및 경성여자청년회의 박원희 김수준, 신기숙 3인을 선출하였다. 이에 따라 동 20일에 경성여자청년동맹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주세죽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여 두 단체의 합동에 대한 승인을 결정하였다.
합동총회는 동 12월 5일 오후 1시부터 천도교당에서 개최코자 했으나 당국의 간섭으로 인해 여성동우회관에서 개최되었다. 회원 50명과 다수 방청인 참석 아래 박원희를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여 총회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두 단체의 간판을 불사르고 새로 중앙여자청년동맹을 빌족시켰다. 동회에서 집행위원으로 金壽子, 辛基淑, 沈恩淑, 姜貞姬(아그니아), 呂英淑, 朴元熙, 郭亨淑을 선출하고 다음 사항을 결의하였다.
1. 本會가 한양청년연맹과 경성청년연맹의 통일을 위하여 朝鮮靑年同盟에 직접 가맹함을 3개월간 연기하고 두 단체의 동맹을 촉진키로 하여 촉진위원으로 김수준, 조원숙, 심은숙, 박원희, 신기숙 5씨를 선정함.
2. 부인의 교양 목적을 위해 연구반을 시급히 실시함.
3. 명년 1월 중순에 조선여성단체연합 대강연회를 열기로 함.
4. 명년 3월 신학년을 기하여 無産兒童學院을 설립키로 하고 그 준비위원은 집행위원에 일임하기로 함.
5. 본회 발회식은 12월 21일(일)로 정함.
6. 사무소는 당분간 朝鮮女性同友會館을 사용함.
결의사항에 나타나듯 양 단체의 통합은 여성계의 통합만이 아니라 조선 내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적 확대에 최후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中央女子靑年同盟이 내건 강령에, ① 무산계급의 권리 및 여성해방을 위하여 청년여자의 단결과 분투를 기한다고 하였는데, “무산계급의 권리란 결코 단순한 의미로 쓴 것이 아니라 전 조선을 사회주의화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그 운동자가 통합 단결하고 이차적으로는 그 세력을 민족운동 속으로 파고들어가게 하여 마침내 자신의 목적을 달해보겠다는 것이라 해도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통합 이후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여성동우회와 중앙여자청년동맹이 주축이 되어 강령 ②에 청년여자의 대중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기한다고 제시한 대로 청년여자에 대한 사회주의 의식화 교육을 위한 대중교양에 힘쓰고, 지방의 여자청년회 세력을 흡수하여 갔다.
槿友會가 조직되기 직전인 1927년 3월 8일에, 여성동우회와 중앙여자청년동맹이 연합하여 이른바 국제무산부인데이를 기념하겠다는 명목으로 다음과 같은 대강연회를 Y.M.C.A.에서 대대적으로 개최코자 하였다가 당국의 금지로 중단된 바가 있다.
① 國際無産婦人데이의 유례 : 朴元熙
② 國際無産婦人데이를 기념하자 : 鄭錫鳴
③ 朝鮮婦人의 國際化
④ 國際無産婦人데이를 맞으면서 朝鮮女性에게 : 李賢卿
⑤ 國際無産婦人데이와 로서아혁명 : 姜貞姬
⑥ 3월 8일과 朝鮮女性 : 朴新友
⑦ 女子解放과 3월 8일 : 羅純金
이것은 국제무산부인데이를 기하여 청년여자들에게 철저한 계급의식을 불어넣어 주려는 의도에서 이처럼 장황한 대강연회를 계획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槿友會가 창립되기 이전의 한국 여성운동의 추이와 사조를 살펴보았다. 여성동우회와 槿友會운동에 참여하였던 황신덕선생은 「朝鮮婦人運動의 史的 考察」에서 槿友會 이전 1920년데 한국여성운동에서 기독교계 여성운동은 봉건사상적 여성관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비판하고, 부인해방이라는 것을 규약과 강령에 직접 내걸고 부인운동을 전개시킨 것은 여성동우회가 효시하고 하면서, “1927년 동회를 해체하기까지 비록 그 시일은 길지 않았으나 그것은 실로 조선역사가 있은 이후 처음인 부인운동기관이었던 만큼 또 그 운동의 선이 확실하였던 만큼 우리 부인운동사상에 빛나는 존재”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 평가에 대하여 우리는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운동을 사회주의적 계급 해방론으로 전개한 것으로는 효시이겠으나, 그 사회주의 여성운동이 바로 한국 여성운동일 수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김선욱, 여성정책과 행정조직, 이화여대 법학연구소, 1999
서명선, 유신체제하의 국가와 여성단체- 한국여성단체협의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여성학논집 제6집, 1989
윤정숙, 여성정책주류화를 위한 여성단체의 역할, 인천시의 여성정책 주류화를 위한 심포지엄, 성정책 주류화를 위한 인천여성연대, 2001
이혜경, 여성운동조직의 자원과 가치에 따른 미디오보도 및 활용에 관한 연구- 한국여성단체협의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한국노동연구원, 여성잠재인력의 활용방안, 1997
한국여성단체연합, 열린 희망-한국여성단체연합 10년사, 동덕여자대학교 한국 여성연구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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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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