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성격, 현황,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도일사, 산업진흥론,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민족운동, 사상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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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재일]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성격, 현황,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도일사, 산업진흥론,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민족운동, 사상단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성격

Ⅲ.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현황

Ⅳ.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도일사

Ⅴ.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산업진흥론

Ⅵ.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민족운동

Ⅶ.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사상단체
1. 흑도회
2. 흑우회와 북성회

참고문헌

본문내용

주의계열의 ‘아나-볼 논쟁’은 일본 사회운동계 뿐만 아니라 한인 유학생과 고학생들에게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曺奉岩은 당시 黑濤會에 참가한 일에 대해 “우리들은 실제에 있어서 관념적 유희에 만족했을 뿐이고, 아무 일도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또 그는 “그저 모든 면에 있어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언론에 시종했다”면서, 흑도회의 언론활동을 비판했다. 때문에 그는 “아나키스트들의 관념적인 유희에는 만족할 수 없어” 조직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볼셰비즘으로 기울었다고 술회하였다. 宋奉禹도 당시 黑濤會가 “머릿자의 그것과 같이 A색채(아나키즘-역자 주)를 가진 會”였기 때문에 자신은 참가하지 않았고, 코스모俱樂部에서 만난 B색채(공산주의-역자 주) 성향의 朝鮮日本中國印度人 등 30여 명과 몇 차례 회합, 의기투합하여 北星會를 결성했다고 회고하였다.
黑濤會의 해체는 정확히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분명치 않다. 두 세력은 1922년 9월말 이념논쟁을 벌인 데 이어 10월경 해체되어 12월경 각각 새로운 조직의 틀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朴烈은 1922년 8월 新瀉縣 학살사건의 조사과정에서 김약수백무 등과 마찰을 빚은 것으로 보인다. 김약수백무 등이 일본지역에 산재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상황을 상세히 조사할 調査會를 결성하자고 주장한 반면, 朴烈은 사회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파괴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박렬은 9월 新瀉縣 사건의 조사경위를 보고하기 위해 서울에 방문하였고, 11월에도 일주일간 체류하였다. 그는 서울 방문에서 無産者同盟會의 책임자인 金翰과 만나 폭탄의 구입을 요청하였다. 김한은 그의 말을 듣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일본스파이 黃玉의 계략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朴烈은 1922년 10월 흑도회가 해산되자, 곧 風雷會를 결성했다. 이어 이 단체는 곧 黑友會로 개칭되었다. 결성 당시 회원은 朴烈과 金子文子를 포함해 申焰波(榮雨)洪鎭裕徐相一朴興坤張祥重 등 10여 명으로 출발하였다. 회원 수는 1924년 당시 30명, 이듬해에는 20여 명에 이르렀다. 회원의 직업은 인부, 일용직 노동자 등 다양한 편이지만, 중심멤버는 역시 노동자 출신 고학생들이었다. 이로 미루어 黑友會는 朴烈 등 고학생들의 주도로 결성된 순수아나키스트들의 사상단체였음을 알 수 있다.
黑友會는 결성 이후 주로 언론출판사업과 일본 및 한인단체와의 연대활동, 그리고 비밀결사 결성에 주력하였다. 黑友會의 언론출판사업은 朴烈과 그의 처 金子文子에 의해 주도되었다. 朴烈은 10월 월간 신문 太い鮮人 1호에 이어 12월호를 각각 발행했다. 그는 발간 취지문에서 “일본사회의 혹심한 오해는 ‘不逞鮮人’이 암살파괴음모를 꾀한다는 것”이며 “우리와 서로 유사한 경우에 있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를 발간한다고 밝혔다. 이어 흑우회는 기관지로 民衆運動을 발간하고, 일본의 급진단체인 抹殺社 등과 교류하였다. 또한 젊고 활동적인 20여명의 청년들을 규합해 비밀결사인 不逞社를 조직, 초청연설회와 친일파 테러 등 반일적 직접행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흑우회의 아나키즘 선전활동과 불령사의 항일 직접행동 노선, 박렬의 폭탄의거 계획 등은 ‘大逆事件’의 빌미를 제공해 조직의 와해를 불러왔다. 즉 1923년 9월 東京大地震 당시 조선인 대학살을 벌인 일본정부와 군부, 경찰과 자경단 등은 ‘조선인과 일본 무정부주의자들의 폭동계획’이란 조작극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박렬과 불령사 회원들을 폭동의 주범으로 몰아가려 했다. 흑우회는 이 ‘大逆事件’으로 와해된 이후, 1924년 9월 이후 재건되어 활동하다가 1928년 1월 黑友聯盟으로 재결집되면서 東京 조선인아나키즘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이에 비해, 김약수백무김종범 등 볼셰비즘 지향세력은 新瀉縣 사건을 계기로 9월 在日本朝鮮人勞動者情況調査會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들은 北海島와 九州에 대한 실지조사를 벌이는 한편, 노동자 학대의 참상을 보고하는 대회를 열었다. 또 이들은 사망자에 대한 장례를 치러주는 한편, 각지의 후원과 당국의 대책을 촉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조직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1월 東京에는 朝鮮勞動同盟會를 조직하였다. 이어 11월 2일 김종범과 김약수는 북성회 대표를 칭하고 大阪의 宋章福池健弘 등을 만나 연락관계를 맺었다. 이를 통해 12월 1일 大阪에서는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朝鮮勞動同盟會가 결성되었다.
北星會 핵심인물 김약수는 이미 1922년 11월부터 日本共産黨의 추천에 의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遠東部 산하의 꼬르뷰로(高麗局) 성원으로 들어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 공산진영은 12월 26일 東京 시내 모처에서 ‘北星會 結成’의 행사를 치른 후, 1월초부터 宋奉禹의 주간 아래 기관지 斥候隊를 발간하였다. 이어 4월 17일에는 朝鮮靑年會館에서 사상강연회를 열어 시위를 벌이는 등 공식활동에 들어갔다.
북성회는 노동단체들을 지원하는 한편, 국내에 들어와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하는데 주력하였다. 이 단체는 山川均片山潛의 볼세비즘노선을 쫓아 일본 사회주의단체인 無産者同盟會에 참가하는 등 국제연대를 도모하였다. 김약수 등 북성회 멤버들은 1923년 10월 서울에서 建設社를 조직한데 이어, 1924년 11월 北風會로 확대 발전하는 등 본격적인 공산주의운동을 주도했다.
이처럼 黑濤會의 해체는 일본에서 전개된 ‘아나-볼 논쟁’을 계기로 촉발되어 1922년 12월경 완료되었다. 黑友會와 北星會로의 분화과정은 이후 전개된 1920년대의 민족운동에 커다란 두 흐름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참고문헌
김진환(2012), 재일조선인 정체성 연구 현황과 과제, 한민족문화학회
김현수(20100, 한일회담에 있어 한국 정부의 재일조선인 인식, 한일민족문제학회
김명섭 외 2명(2007), 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 : 통합적 명명을 위한 기초연구, 21세기정치학회
김숙자(2007), 재일조선인의 정체성과 국적 : 재일조선인 3세를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서경식(1996), 재일조선인의 위기와 기로에 놓인 민족관, 한국역사연구회
조관자(2011), 민족주체를 호출하는 재일조선인,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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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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