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한국근현대사와 조선후기, 한국근현대사와 서원철폐, 한국근현대사와 갑신정변, 한국근현대사와 개항기운동, 한국근현대사와 시일야방성대곡, 한국근현대사와 독립군, 한국근현대사와 해방전후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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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현대사]한국근현대사와 조선후기, 한국근현대사와 서원철폐, 한국근현대사와 갑신정변, 한국근현대사와 개항기운동, 한국근현대사와 시일야방성대곡, 한국근현대사와 독립군, 한국근현대사와 해방전후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한국근현대사와 조선후기

Ⅲ. 한국근현대사와 서원철폐

Ⅳ. 한국근현대사와 갑신정변
1. 갑신정변의 원인
2. 갑신정변의 결과
1) 청군의 불법적 범궐과 군사적 공격이다
2) 개화당의 일본군 차용과 일본군의 철병이다
3) 개화정책을 지지할 사회계층으로서의 시민 층의 미성숙이다
4) 개화당의 민비와 청군의 연락에 대한 감시의 소홀과 정변 수행기술의 부족을 들 수 있다

Ⅴ. 한국근현대사와 개항기운동

Ⅵ. 한국근현대사와 시일야방성대곡

Ⅶ. 한국근현대사와 독립군

Ⅷ. 한국근현대사와 해방전후
1. 해방에 대한 이해
2. 건국준비위원회의 좌절
3. 신탁통치와 미소공동위 문제

참고문헌

본문내용

각 정치세력이 ‘삼인일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많은 정당, 정치단체를 만들기에 이름지었다. 9월 6일 미군이 서울에 진주, 9월 9일에 아베 총독과 항복 조인을 체결하였다.
3. 신탁통치와 미소공동위 문제
해방 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사실상 미군정이 정부로서 기능하기 시작. 아울러서 임시 분계선이던 38선이 차츰 현실적인 국경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얄타협정에 따라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투를 시작하였다. 미국의 요구에 따른 것. 관동군은 사기를 상실하고 쉽게 무너져, 8월 11일에 이미 소련군이 함경북도 지역에 진주하기 시작, 12일에는 나진, 13일에는 청진까지 남하. 이에 다급해진 미군측에서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활동지역 구분을 위한 선으로서 38도선을 제시하였다(딘 러스크와 본 스틸웰 두 대령). 소련에서 이를 수락하였고 이러한 양국의 책략이 남북분단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두 나라 다 무장해제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 국가에 이익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미군의 태도는 단순히 무장해제 차원이 아니라 ‘점령군’이었으며, 명실상부한 군정 즉 군사정부로서 행동이었다. 이것이 38선이 고정되는 중요한 원인. 그렇지만 이를 극복하기 보다는 이러한 미국, 소련의 태도를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한 세력이 있었고, 그 술수에 말려들어간 국민들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패전국으로서 5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던 오스트리아의 사례.
미군정의 또 다른 문제는 미국의 문화가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이다. 특히 교육의 경우 이때부터 미국식 교육제도(실용주의 교육)이 정착되었다. 일제 식민지시기에 단절된 전통문화가 이 시기에 또한 심각한 타격을 받으면서 단절의 골이 더 깊어지게 되었다. 소도 - 사찰 - 서원 - 교회? 아무튼 우후죽순처럼 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교회 첨탑 위의 피뢰침. 우리 나라 교회는 지역사회와 관계가 없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러한 미군정에 대해 임시정부측은 미국의 승인을 요구하였으나 결국 개인 자격으로 입국, 임시정부로서의 기득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좌익 쪽에서는 급히 조선인민공화국을 만들었으나, 역시 불법단체로 활동한 상황이었다. 건준의 좌절에 이어 임정의 해체가 이어지는 과정의 문제는 미국의 방침이 기본적으로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여기에 국내세력이 미군정에 대해 책동한 것이 더해졌다.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협성중앙협의회(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확대),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등 동아일보계열(지주 자본가)의 한국민주당,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심이 된 한국독립당 등이 대표적 우익 정치단체였다. 임시정부 부주석이었던 김규식이 중심이 된 민족자주연맹, 여운형이 중심이 된 조선인민당 등이 중도적 정치단체였다. 박헌영 등이 재건한 조선공산당, 되에 이를 남조선신민당, 근로인민당과 합쳐서 만든 남조선노동당이 좌익 정치단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처음에는 우익 전반이 임정을 중심으로 활동할 것을 희망했으나, 이승만 한민당 계열에서 부추겨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었다. 정치적 구심점이 완전히 사라진 상황에서 수많은 정치단체, 정당이 각각 주도권을 쥐고자 활동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누가 미국의 현실적 이익과 관련된 대한정책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따를 것인가, 친일파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등이 관련되면서 미군정의 비호를 받는가에 따라 남한 정권 담당자가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그 승리자가 결국 이승만이었던 것.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신탁통치 문제를 절묘하게 이용하였다.
신탁통치는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내에 적어도 자국에게 불리한 정권을 만들지는 않겠다는 의도에서 생각해낸 것이 당초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것이다.
1945년 1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은 미국은 미 소 영 중 4대국의 5년 신탁통치, 필요하면 5년 연장안을 제시 / 소련은 한국민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과 이를 4대국이 후견하는 방식을 제안, 소련안을 중심으로 타협되었다.
이를 동아일보에서 왜곡 보도는 소련이 38선 분할점령을 구실로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 미군의 검열을 통과한 보도라는 데에 의문점이 있는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좌, 우익 모두 반탁, 실상이 파악되면서 좌익에서 찬탁으로 돌아섰다. 좌익은 찬탁 -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판단하였고(당시 전농, 전평:노동자단체 등은 모두 사회주의 성향이었음) / 우익은 반탁 - 좌익과 함께 임시정부를 구성한 경우 주도권을 쥘 수 없다는 판단하였다. 반탁운동이 거세게 진행되는 가운데 1946년 봄의 미소공위(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정당과 사회단체 선정이 안건)가 결렬되었고 소련은 반탁 세력은 배제하자고 주장, 미국에서 이를 거부하였다 / 6월 3일 이승만이 ‘정읍 발언’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 / 이미 전부터 미 국무부가 단독정부 수립 추진, 이승관 정권 승인이라는 보도가 나돌던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추진된 것이 좌우합작운동(김규식, 여운형, 김구) - 대부분의 좌우익에서 비판하였다. 1947년 봄의 미소공위도 좌절된 뒤 결국 한국 문제는 UN으로 넘겨지고 단정반대운동이 일부 있었으나 결국 선거에 의해 이승만정권 탄생. 1948년 2월 유엔에서 ‘가능한 지역만에서의 총선거’안을 가결, 8월 15일 정부 수립되었다. 북한 정권은 이보다 뒤늦게 9월 9일에 정부를 수립. 그렇지만 1946년에 토지개혁을 실시한 바 있고, 1947년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이어서 조선 인민군을 창설하고 1948년 4월에 헌법을 채택. 따라서 이미 역시 단독정부 수립의 길을 걸어왔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김성보, 탈중심의 세계사 인식과 한국근현대사 성찰, 한국역사연구회, 2007
김성보, 내재적 발전과 국제적 소통의 관점에서 본 한국근현대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9
박찬승,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다, 경인문화사, 2010
성기현, 한국 근현대사 선택과목의 교수·학습 실태와 개선 방안, 고려대학교, 2005
윤희면, 고종대의 서원 철폐와 양반 유림의 대응, 한국근현대사학회, 1999
최준, 시일야방성대곡, 신태양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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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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