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5 18광주민주화운동(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중항쟁),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학생독립운동,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노동운동,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민족운동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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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주광역시]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5 18광주민주화운동(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중항쟁),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학생독립운동,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노동운동,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민족운동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5 18광주민주화운동(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중항쟁)

Ⅱ.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학생독립운동
1. 1929년의 시위
2. 1930년의 시위

Ⅲ.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노동운동

Ⅳ.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민족운동

참고문헌

본문내용

에서는 청년학생 조직을 지도해 나갔다. 그러나 Y부에 속해 있던 인물들은 반드시 당원은 아니었으나, 항일운동과 민족독립운동을 위해 투쟁 해 나갈 민족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함양시키기 위한 청년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들이 ‘성진회’를 이끌어 나갔다. 당시 ML당원으로는 강석봉 위원장을 비롯한 지용수강영석조길상최용운 등이 광주에서 활동했고, 유혁(영암)조용남(영광)국종덕(담양)조명철주재학(화순) 등이 각각 지역별로 활동을 벌였다. 강해석은 1927년 3월에 ‘고려공산청년회’에 입당하였다.
Y부 조직에 의해 결성된 ‘성진회’는 1926년 11월 3일 광주의 불로동(현 불로동) 최규창의 하숙집에서 장재성(당시, 광주 고보 5년, 1908년 생)왕재일(당시, 광주고보 5년)박인생(당시, 광주 농고 5년) 등 총 16명이 모여 조직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따른 격양된 민족적 감정과 불만을 집약하고 항일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야겠다는 필요에서 뜻을 같이 하였는데, 그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당시 국내 각급 학교에서 일본역사를 ‘국사’라고 일컫고 일본인의 조상인 천황대사를 조선의 민족신 단군과 형제가 된다고 가르친 데에 있었다. 이와 같은 기만적 교육이 계속되면 순진한 조선학도의 민족의식이 박약해질 것을 우려한 이들은 비밀결사인 성진회를 조직하고, 총무에 왕재일, 서기에 박인생, 회계에 장재성 등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 강령으로는,
· 우리들은 간악한 제국주의 일제를 타도한다.
· 우리들은 만민이 공락(共樂)할 국가 사회를 수립 보전한다.
· 우리들은 정의의 햇불을 높이 들어 온 세계를 비추며, 이 찬란한 광명 속에 인류만이 찾을 수 있는 반전(反戰)과 가없는 평화를 이룩한다.
등이었다. 즉, ‘성진회’의 목적은 당시 학내 투쟁에 머물러 왔던 학생운동을 한차원 높인 민족해방투쟁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로 전환하는 데에 있었다.
특히 강해석은 ‘성진회’의 조직 초기단계에서부터 지용수와 함께 지도임무를 맡았다. 이는 당시의 재판기록을 검토하면 잘 드러난다. 강해석은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복역하던 도중, 1930년에 ‘성진회’에 관계한 사실이 드러나 징역 1년형이 추가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배후를 집요하게 조사한 총독부 경무국은, “‘성진회’가 강해석지용수한길상장석천강영석 등에 의해 1926년 여름부터 광주농고생 왕재일정남균, 고보생 국순엽장재성 등을 지도하여 결성한 사회주의 학생비밀 결사조직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강해석이 ‘성진회’의 지도에 관여하였다는 사실은 1996년에 작고한 항일광주학생운동가 고 이기홍옹의 다음과 같은 생전 증언에서도 밝혀졌다.
실천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니 지방별로 시작된 지하의 지도조직이 점점 발전해 가면서 1925년에 항일독립운동의 중앙지도부가 구성되었고, (중략) 전라남도에서도 1925년에 전 도내의 항일운동을 각 분야별로 지도하고 있던 중앙지도부의 전남지부가 결성되어 위원장으로 강석봉 선생을 임명하였고, 청년학생부 책임위원은 지용수 선생이었다. 학생조직이 확대 강화되자, 강해석 선생을 보충하여 두 사람이 지도했다. 처음에는 조직 학생수가 소수였기 때문에 각 학교의 애족운동을 총망라하여 1926년 11월 3일에 26명(필자주:16명의 오인이 아닌가 한다)으로 구성된 성진회를 조직하여 주로 이론 교양을 지도했다.
그리고 최근에 출간된 고 이기홍옹의 학생독립운동의 증언을 담은 유고집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인용해 본다.
“1926년 11월 3일 조직된 성진회는 제3차 조선공산당, ML당 Y부(학생지도부)의 강해석(姜海錫)씨로부터 지도를 받고 있었어요. 성진회의 각 학교 대표로 광주고보는 장재성(張載性), 광주농업학교는 문승수(文升洙)가, 사범학교는 임종근(林鍾根)이 각각 맡아서 활동 했어요”
이상과 같은 고 이기홍옹의 증언은 강해석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기반이 된 ‘성진회’를 중추적으로 지도해 나간 청년운동가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고 하겠다.
한편 ‘성진회’는 1929년 6월 중순경 이제까지의 활동이 분파적개별적이었던 까닭에 전열이 분산되었으므로 다시금 강력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하여 ‘독서회’로 변신하였다. ‘독서회’는 광주지역의 항일 맹휴를 주도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928년 6월 26일부터 본격화 되는 항일 맹휴의 도화선이 된 ‘이경채 사건’이다. 1928년 광주고보 5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경채는 친구인 박병하윤해병 등과 1927년 여름부터 ‘사회과학 연구’에 몰두해 오다가, 1928년 3월 28일~4월 18일에 이르기까지 항일 성토문을 작성하여 광주시내와 송정리 곳곳에 첨부하고, 또한 각 중학교, 경찰서 등에 우송했다. 일본 경찰은 이에 대해 그 혐의를 이 지역의 청년회에 두고 수색을 해 나갔다. 그 결과 광주에서 파견된 경관대는 송정청년회장 이성태를 비롯, 조칠성박남수 등을 구속했고, 동년 4월 21일에는 ‘광주소년연맹’ 위원인 김판엄김만년과 김재천(당시, 광주고보 5년) 등을 구속했다. 이 과정에서 10여 명을 취조 끝에 강해석과 장석천국채진한길선 등이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즉, 강해석은 ‘성진회’의 지도는 물론이고, 학생들의 항일 집단 맹휴사건의 시발점이 된 ‘이경채 사건’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해석은 ‘이경채 사건’과 관련하여 면소되어 석방되었지만, 이후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관련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29년 12월 경성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아, 1932년 8월 만기 출소하였다. 그 과정에서 1930년 ‘성진회’ 사건으로 징역 1년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1. 김성민,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양상과 이념, 문화체육관광부, 2009
2. 김성민, 광주학생운동연구, 국민대학교, 2007
3. 송미성, 광주지역 \'노동운동 참여자\'의 정체성 변화, 전남대학교, 2010
4. 신주백, 일제하 민족운동과 광주항일학생운동,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1996
5. 이상식,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배경, 향토문화개발협의회, 2002
6. 조재구,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에 관한 연구, 중앙대학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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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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