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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래][유교사상][개신교][감리교][천주교][성결교회][유학][불상][도자기]유교사상의 전래, 개신교의 전래, 감리교의 전래, 천주교의 전래, 성결교회의 전래, 유학의 전래, 불상의 전래, 도자기의 전래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유교사상의 전래

Ⅱ. 개신교의 전래

Ⅲ. 감리교의 전래

Ⅳ. 천주교의 전래

Ⅴ. 성결교회의 전래
1. 서론
2. 역사적 특색
1) 한국인으로 시작한 선교
2) 자립의 움직임

Ⅵ. 유학의 전래
1. 들어가는 말
2. 삼국시대의 유학
3. 통일신라에서 지위 확보
4. 유학자와 육두품

Ⅶ. 불상의 전래
1. 삼국시대
2. 통일신라 시대

Ⅷ. 도자기의 전래

참고문헌

본문내용

, 이도다완의 기록은 1578년 처음 보인다. 텐쇼(天正)년간(1573~92)에는 그 수요가 급증하여 조선으로부터 많은 수의 다기를 유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는 임진왜란으로 이어짐은 잘 알고 있는 사실들이다. 고려다완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조선 시대의 일상잡기를 다기로 사용한 미시마(三島)다완, 이도(井戶)다완, 코히키(粉引)다완, 카타데(堅手)다완, 아마모리(雨漏)다완, 코모가이(熊川)다완 등이다. 또 하나는 일본에서 조선에 주문해 만든 ‘고혼(御本)다완’으로 소바(蕎麥), 토토야(斗斗屋), 카키노헤타, 이라보(伊羅保), 킨카이(金海), 고쇼마루(御所丸), 고키(吳器) 등이다. 특히, 고려다완의 정수인 이도(井戶)다완은 크게 형태·종류에 따라서 오오이도(大井戶), 아오이도(靑井戶), 코이도(小井戶) 등으로 분류된다. ‘이도’란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인명설·지명설·형태설 등 여러설이 있다. 이도다완의 아름다움은 비파색 혹은 회갈색의 유약, 대나무 마디 모양의 몸체, 몸체 부분의 매화피(梅花皮, 입상의 요철) 유약 등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완의 밑 부분이 상어피부처럼 오톨도톨한 것은 낮은 가마온도때문에 유약이 잘 녹지않아 생긴 것인데, 그것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조선의 도자기에 밝은 \'고야마 후지오\'는 이도다완의 생산지가 경상남도 진주 근처라고 주장하였다.해방 후 우리나라에서도 이도다완의 생산지 찾기가 시작되어 진주서쪽의 \'하동군 진교면 샘골마을\'에 있는 가마터에서 이도와 매우 닮은 도자기 파편이 발견되었다. \'이도다완의 고향발견\'이라는 뉴스가 일본에서도 크게 보도되엇으나, 옛가마터에서 눈에 띈것은 약간 푸른기를 띤 아오이도(靑井戶)조각이었고, 문제의 오이도(大井戶)는 아니었다. 타케노 죠우오우,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후루타 오리베가 소지했다고 전해지는 오오이도(大井戶)다완은 후지타미술관·미츠이문고·도쿠가와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주목을 끌고 있으며, 네즈미술관 소장품으로서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오다노부나가 소지했던 아오이도(靑井戶) 다완 등이 유명하다. 김해는 부산포근처에 있는데 거기서 구워진것이라서 \'킨카이(金海)다완\'이라 이름지어졌으며 \'고모가이(熊川)\'는 3포(부산포,제포,염포)의 하나이던 웅천(현 경남 창원시)의 제포에서 유래한 것이다.\'미시마(三島)\'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 세개의 섬으로 되어있는 거문도에서 실어왔기때문에 그이름이 붙었다라든지 시즈오카현의 미시마신사에서 발행하는 달력의 장식문양과닮은데서 유래하였다고 하는 등 여러가지이다. 그러나 거문도에서 실어갔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는 설이다. 미시마가 전래된무로마치시대의 개항장은 삼포뿐이고 다른항구에는 일본배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고있었기 때문에 거문도라고는 생각할수 없다. 일본 다도의 원점이 조선에 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조선의 막사발에서 도자기가 갖는 새로운 미를 먼저 발견한것은 일본의 다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도다완은 분청은 회청색의 몸체에 백토를 바르거나 또는 문양을 긁어내거나 산화철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한국인의 독자적인 창안에 의한 이채로운 심미(審美)감을 지니는 것이다.
15C에서 16C를 거치며 하얗게 분장한 면 위에 철화(鐵畵), 선각(線刻), 박지(剝地)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며 그 표현방식은 익살스러움이 있고 정돈되지 않은 듯 수더분하며, 그 형태와 문양은 자유롭고, 구애받을 것 없는 분방함, 박진감 넘치는 표현으로 현대적이면서도 가장 한국적인 미(美)의 원형을 간직한, 가장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옛날 우리의 사기장들은 대를 이어가며 평생 도자기를 만들었으나 그 생활은 무척 가난하였고 무명(無名)으로 평생 무념(無念) 속에서 자연과 같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욕심이 없는 마음으로 도자기를 만들며 그 특질은 도자기에 배어 꾸밈없는 아름다움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일본의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을 추구하는 미감(美感)을 갖는 지배 계급들의 문화와 맞아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일본인들은 조선의 좋은 찻잔을 갖는 것은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써 하나의 성(城)과도 바꿀 수 있는 가치를 지니게 되며 마침내 신기(神器)로 까지 부르게 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도 공이 만드는 막사발은 보물(이도다완 井戶茶碗)이 되어 일본인들이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는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 도자기에 대한 경모감을 갖고 그들이 데려간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그 후 조선의 분청사기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도공과 가마의 상실, 사회적 변화를 거치며 점차 백지화되어가며 사라지게 되었다.
이도다완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자 수수하면서 소박하고, 뭐랄까 서민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듯했다. 사실 옛날 그런 종류의 막사발들은 말 그대로 막 사용되었는데 일꾼들의 새참밥그릇도 되었고 서민들의 저녁식사 때 밥상을 차지하고 있기도 했고, 심지어 마당의 개밥을 놓는 그릇으로까지 사용되었다. 그런 흔했던 도자기가 왜 일본인들에겐 전쟁을 일으키면서까지 얻어야 했던 보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과거 섬나라 일본은 문화적 열등감에 시달렸고 그래서 그들은 우리나라의 도자기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도다완이 갖는 자연스러움과 소박함, 꾸밈없는 모습은 그들의 다도목적에 정말 잘 맞는 것이었을 것이다. 일본의 권력자들은 이런 도자기에 보석같은 가치를 주었고
이런 일들은 도요도미의 침략의 계기가 된 것이다.
참고문헌
◈ 김혜숙, 불상조각의 문화 교육적 이해, 한국초등미술교육학회, 2008
◈ 이만수, 한국성결교회의 사중복음 전래과정 연구, 성결대학교, 2003
◈ 전점례, 천주교의 전래가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 한국교원대학교, 2004
◈ 조성대, 유교사상의 현대적 의미, 한국행정사학회, 2001
◈ 최복상, 한국개신교의 전래와 수용배경에 관한 연구, 경희대학교, 1975
◈ 최대용, 웨슬리신학과 한국감리교 교리적선언의 비교연구, 서울기독대학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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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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