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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좌파, 좌익, 좌파정당]좌파(좌익)와 좌파정당, 좌파(좌익)와 신좌파론, 좌파(좌익)와 중도좌파정부, 좌파(좌익)와 서유럽, 좌파(좌익)와 영국노동당, 좌파(좌익)와 프랑스정당, 좌파(좌익)와 조선민족혁명당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좌파(좌익)와 좌파정당

Ⅲ. 좌파(좌익)와 신좌파론

Ⅳ. 좌파(좌익)와 중도좌파정부

Ⅴ. 좌파(좌익)와 서유럽

Ⅵ. 좌파(좌익)와 영국노동당

Ⅶ. 좌파(좌익)와 프랑스정당

Ⅷ. 좌파(좌익)와 조선민족혁명당

참고문헌

본문내용

주연합국’으로부터 승인받을 가능성을 크게 염두에 두고 있다. 특히 동맹국 가운데서도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승인받을 가능성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중국 국민정부는 뒤에서 보겠지만 오랫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왔는데, 독소전쟁 발발 후 급격한 유럽 정세 변동에 따라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고 민혁당은 그 점을 높이 사고 있었다.
연합국에 의한 유럽 망명정부의 승인 → 중국 국민정부에 의한 임시정부 승인 가능성의 대두→ 민혁당의 임정 참여 결정이라는 주장은 당시의 문헌에 의해 일면 보강되는 듯이 보인다. 당시에 작성된 한 자료에 따르면 1941년, 중국 국민정부 외교부장 곽태기가 김구김원봉 등과 만나 임정 승인문제를 거론하면서 양당 즉 민혁당과 한독당의 단결 합작을 희망하였고, 이 같은 곽태기의 말을 듣고 민혁당은 임정 불참가라는 종래 정책을 버렸다고 한다.
郭泰祺의 역할은 金弘壹의 회고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金弘壹의 회고에 의하면 中國 國民政府 駐英大使 郭泰祺가 영국에서 근무할 때 유럽 망명정부들이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망명정부들의 존재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영국정부는 郭泰祺에게 駐中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종용’했다고 한다. 영국 정부는 중국정부가 솔선하여 임정을 승인하고 나면 뒤이어 영미소도 승인할 것이며, 이는 한인들의 항일운동을 고무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후 郭泰祺는 귀국하여 중국 국민정부 외교부장에 취임하자마자 정부 고위층에 건의하여 임정을 승인할 채비를 서둘렀고, 郭泰祺는 중국정부의 그러한 뜻을 임정에 전달했다고 한다.
김홍일 회고에 따르면 이 사실을 알게 된 민혁당 측은 “자기들이 참여하지 않은 임시정부가 연합국에 의하여 승인”될 사태를 크게 우려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민혁당 측에서는 “각 당파가 모두 참가할 때까지” 중국 정부는 임정 승인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상에서 볼 때 우선 국제(세계) 정세가 급격하게 변동하고 중국정부의 임정 승인의 가능성이 높아가자 민혁당은 (1)민족운동 역량의 통일 (2)국제원조의 획득 (3) 특히 중국 국민정부의 지지 획득을 위해서 임정 가담의 결심을 ‘굳혔음’은 분명하다. 이상의 주장이나 언급에서는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동과 중국 국민정부의 임정승인 시사가 민혁당의 기존 임정에 대한 정책 ‘전환’의 배경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민혁당이 임정참여를 결정한 시점은 독소전쟁 발발 이전인 41년 5월이었다. 즉 민혁당은 1941년 5월 당의 第5屆 7次 회의에서 임정참여를 결의하고 임정을 지지하였다. 앞서 본 주장들이나 언급은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우선 郭泰祺의 발언과 민혁당의 정책 변화의 상관성을 보자. 위에서 郭泰祺가 한인 민족운동가들에게 임정 승인을 시사하였다는 시점은 1941년이라고만 하여 독소전쟁 발발 이전인지 이후인지가 분명치 않다. 그런데 1941년 10월에 작성된 한 문서에 의하면 중국 외교부장 郭泰祺는 임정의 金九趙素昻과의 면담에서 “임시정부 승인문제를 영미 양국 정부와 협상하고, 일간에 중국의 국무회의에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 문서도 정확히 언제 처음으로 중국정부가 임정승인을 시사했는지는 보여 주지 않고 있다. 단지 郭泰祺가 1941년 가을에 임정 승인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음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한편 金弘壹의 위 회고록에서 언급했듯이 중국 정부가 임정을 승인하면, 소련도 호응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언급이 사실이라면 郭泰祺에게 영국 정부가 종용한 때는 적어도 독소전쟁 발발 이후였을 것이다. 또 金弘壹은 같은 회고록에서 郭泰祺가 중국으로 귀국한 시점을 의용대가 팔로군과 합작한 즈음이라고 하였다. 의용대 주력 80여명이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간 시점은 1941년 6월이었고 그곳에서 중국 팔로군의 원조아래 체제를 정비한 후 팔로군과 합작하여 본격적인 무장항일선전활동을 전개했던 때는 1941년 가을이었다. 金弘壹의 회고를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郭泰祺는 1941년 6월 이후에 귀국하였고, 중국 국민정부는 또한 1941년 6월 이후에 임정승인을 시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면 결국 중국 국민정부의 임정승인 시사 발언은 민혁당으로 하여금 임정 참여 결심을 더 한층 굳히게 했음은 분명하나, 민혁당은 독소전쟁 발발이나 국민정부의 임정승인 시사 발언 ‘이전에’ 이미 임정 참여를 결정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본 민혁당 측이 공식적으로 밝힌 임정 참여 결정 배경은 타당하지 않다. 공식적 주장이 사실과 다른 이유는 아마도 민혁당 측이 당시 임정 참여 결정의 진짜 배경을 밝히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 진짜 배경은 유쾌하지 않은 민혁당 혹은 좌파 내부 사정과 깊이 관련된 문제이거나 혹은 중국국민당과 관련된 껄끄러운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미 국내 학계에서는 민혁당의 임정 참여 결정 배경으로 급격한 국제정세 변동 혹은 중국 국민정부의 임정승인 시사만이 아니라 민족운동 진영 내부문제에도 관심을 둔 바가 있었다. 일찍이 盧景彩 교수는 민족혁명당 당수 金元鳳이 임정참여를 결정하게 된 배경의 하나로 김원봉 휘하에 있던 핵심세력이 화북으로 이동함으로써 그의 세력이 약화되어 독자적인 활동이 어려워지게 된 점을 지적한 바 있다. 핵심 세력 즉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한 때는 1941년 봄이었다. 또 韓詩俊 교수도 좌익진영이 임정에 참여하게 된 주요 요인의 하나로 江會議(1939년 8~9월) 이후 세력이 분열되고 좌익 연합체(朝鮮民族戰線聯盟)가 와해된 사실을 들고 있다. 한교수는 좌익 연합체가 와해된 시점을 1940년 가을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
구영록 외(1999), 정치학개론, 개정판. 박영사
김경미(2009),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에 대한 이론적 좌표설정 모색, 한국정치정보학회
박성조(2005), 좌파 우파간의 갈등을 넘어, 법문사
윤소영(2008),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대안좌파, 공감
앤서니 기든스 저 | 김현옥 역(2008),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한울
유동열(2010), 한국좌파운동 현황분석, 자유민주연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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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1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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