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배경, 조직과 목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우익진영, 국제연대 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청년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남북회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평양전쟁(미일전쟁, 제2차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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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배경, 조직과 목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우익진영, 국제연대 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청년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남북회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평양전쟁(미일전쟁, 제2차세계대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배경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과 목적
1. 임시정부의 조직
2. 임시정부의 목적
3. 의의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우익진영
1. 한민당
2.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연대 활동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청년단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남북회담
1. 북한의 「3월서신」
2. 특사 파견과 회의 성립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평양전쟁(미일전쟁, 제2차세계대전)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oreign Agent Registration Act) 위반으로 옭아맴으로써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비공식적으로 책임감 있고 믿을만한 한국인들에게 요청하여 망명정부(refugee government)와 비슷한 형태의 조직을 수립하게 한다. 여기에는 아마 재미한족연합회의 임원들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체는 한국투쟁위원회(Fighting Korean Committee)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체에서 이승만은 그의 나이나 경력에 맞는 직함을 갖게 될 것이나, 실질적인 집행부는 보다 젊고 책임감있으며 공격적인 한국인들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셋째, 권력 자체가 아니라 상징적인 권한을 이 한국인 기구에 주어야 한다. 최종적인 통제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어야 하고, 한국인들 내부의 치명적인 암투는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1943년 후반 한인단체들이 오히려 한층 분열되는 것으로 보아 이 통합구상은 별 실효를 못거두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인 정책에 나타난 완곡한 표현이나 요망사항과는 달리 실제 한국관련 정책담당자나 공작실무자들이 한인들 내부에 개입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이들이 제일 먼저 고려하였던 것은 정치적 성향과 개인적 역량, 명망성이었다. 또 실질적 권한을 한인들에게 넘겨주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견지하였다.
Ⅸ. 결론
공산당은 중국국민당 못지않게 일찍부터 한국문제나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한국의 독립과 이후의 정치적 진로문제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일정한 대책을 세우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 정권과 마찬가지로 장래의 한중관계가 중국의 국가적 이익과 안보를 위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점차 일제의 패망이 예견됨에 따라 한국이 독립될 것으로 파악했다. 또한 추후 독립된 한국의 장래는 그들과 연계된 좌익 정치인의 수중에 장악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지원하는 국민당정부를 의식하고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나름대로 후원했으며, 이들에 대한 포섭과 사상공작에도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중국공산당 막후 실력자의 한사람으로 제2차 국공합작 이후 중경에 파견되었던 주은래는 “중국과 한국관계는 장차 확실히 중요할 것이다. 제1차 중일전쟁 중에 중국이 조선에서 실패한 것은 청 전제제도가 붕괴될 신호였다”라고 하여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를 중요하다고 전망했다. 그래서 그는 1940년 9월경 국민당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자질이 뛰어나고, 이들이 장차 귀국한 뒤 수행할 잠재능력이 크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이후 그는 이들을 포섭하여 중공당의 세력범위로 이동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해방 직전 중국공산당의 한국문제에 대한 구상은 1945년 8월 11일 팔로군 총사령 주덕이 조선의용군에 내린 명령을 통해 잘 파악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중국 및 조선 경내에 진군하여 싸우는 소련 홍군에 배합하고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나는 명령한다.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벌이고 있는 조선의용대 사령 무정, 부사령 박효삼박일우는 즉시 소속부대를 통솔하여 팔로군 및 원동북군 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출병하며 적과 괴뢰군(만주국군: 인용자)을 소멸시키고, 아울러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하여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할 것.
위의 명령은 중국공산군과 조선의용군이 만주지역에 신속히 도달하지 못하고, 또 불과 나흘 뒤에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중국공산당이 조선의용군을 별도의 부대로 편성해서 중국동북으로 진격케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한국을 해방시키려했다는 구체적 정책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미국 등 열강의 의사에 종속되어 차일피일 임시정부의 승인을 미루고 광복군의 직접 참전을 통제해 온 중국 국민정부의 방침과는 뚜렷이 대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 내의 반공주의자 엄항섭같은 일부 각료조차 중국공산당이 한국독립에 호의적이라고 평가하기까지 했다.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만주로 출발하기 앞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은 축사를 했다 “조선의 완전독립 없이 중국의 독립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 동지들의 목적달성은 우리보다 앞설 것이다. 최후의 목적 달성을 위해 건투해주기 바란다.” 이는 모택동이 한국문제를 중공당의 현안문제와 곧바로 연결시킬 정도로 중요하게 인식했으며, 해방후 공산정권의 수립을 확고한 신념으로 예측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1940년대 전반기 중국공산당은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지지하면서도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형식을 통해 성원을 보냈다. 즉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는 한편 임시정부 승인문제나 한국광복군 문제 등에 대해 임시정부의 입장을 지지후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新華日報》등 언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에 비해 더 진보적이며 민주적 지원을 했다고 해도 그들 역시 한인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편의주의적 사고방식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했다. 또 중국공산당의 좌익계 한인 운동세력에 대한 포섭과 지원은 중국국민당 정권의 이들에 대한 영향력을 차단시켜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인 민족운동 세력을 양단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때문에 1940년대 중국국민당 및 중국공산당 정권의 병존양립이 해방 이후의 한국현대사, 즉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의 발발,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이 시기 중국공산당의 존재와 활동은 한반도의 분단과 냉전의 심화 등 한반도에 미친 영향과 책임이 상당한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과 그 이념, 삼균학회, 2006
이봉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바로알기, 정인출판사, 2010
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혁과 그 성과, 동선사학회, 2001
이현희, 건국강령에 나타난 홍익인간정신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이념, 삼균학회, 1984
윤대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건과 관내 민족전선통일운동, 역사학연구소, 2002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기념일, 바로잡아야, 한국근현대사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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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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