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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성, 수립배경,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정승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인사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남화한인청년연맹,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남북연석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애국부인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성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배경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정승인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인사회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남화한인청년연맹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남북연석회의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애국부인회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정이라고 밝혔다. 이후 애국부인회는 긴급회의를 소집, 이들이 필요로 하는 종이필기구와 소금 등의 지원에 대해 협의하였다. 1945년 봄에는 싱가포르수용소에서 이송되어 온 일본군위안부 출신 한인여성 10여 명에게 임정활동에 대한 설명과 소양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외에 조선민족혁명당 계통의 여성조직으로 旅朝鮮婦女會가 있었다. 南京朝鮮婦女會의 후신으로 1939년 2월 성립되었다. 임무로는 조선의용대 후원중국항전사병 위로자기수양을 표방하였다. 주요 활동인물은 집행위원: 張熙守(총무)李蘇元(선전)金明淑(조직), 후보위원: 張秀延李錦相 등이었다. 중국여성단체들과 연계를 맺고, 중경시부녀회의 헌금활동, 중국장병 및 조선의용대 위문활동 등에도 참가하였다. 단기훈련반을 개설, 한인들에 대한 교육훈련도 실시하였다. 1939년 3월 8일 ‘國際婦女節’군중기념대회에는 장수연이 대표로 참가하여, 한중 양국 여성의 신분해방과 반일투쟁 참가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였다.
Ⅸ. 결론
임시정부와 중국(국민정부)과의 관계는 크게 보면 1937년 7월의 중일전쟁을 계기로 하여 두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1932년 4월 尹奉吉의사의 의거를 주요한 계기로 인정하여 세시기로 나누어 고찰하는 시각도 있다. 즉 ① 임시정부의 수립부터 윤봉길 의거까지의 시기-중국 정부의 일부 관리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시기, ② 윤봉길 의거 이후부터 1937년 중일전쟁 발발시까지의 시기-중국 정부에서 비공개적으로 한인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던 시기, ③ 중일전쟁 이후부터 임시정부가 귀국하기까지의 기간-중국정부에서 재정군사외교적으로 임시정부를 공식지원하던 시기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중국정부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중국에 대한 외교를 정부와 정부사이의 공식 관계가 아니라 중국국민당과 군사위원회 등을 통한 비공식적 관계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즉 중국 국민정부의 입장에서는 단체와 개인을 중개로 한 민간접촉의 형식으로 지원하는 형식이었다는 비판적 시각에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의 관계를 단순히 이러한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특수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세 번째 단계에서의 임시정부와 중국(국민정부)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고찰코자 한다.
중국혁명의 영수 손문의 뒤를 이어 중국국민당의 실력자로 등장한 蔣介石은 1924년의 제1차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1927년 4월 반공쿠데타로 南京에 국민정부를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각 지역에 할거한 군벌세력은 여전히 위협적 존재였고, 중국공산당 세력은 강화되고 있었다. 이에 국민정부는 ‘내치’를 우선시하며 공산당 토벌에 열중했기 때문에 일제의 중국동북지역(만주) 침략에는 무저항 정책을 취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국민당정부의 한인독립운동에 대한 공식적 입장은 마련될 수가 없었다. 일본에 대한 항전을 회피하던 소극적 국면이 적극적 단계로 전환된 것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였다. 이후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한인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촉구하였고, 상당한 한계가 있었지만 한중연합을 매개로 한 적극 항전노선을 취하였다.
한국이 일제에 병탄된 뒤 중국인들은 대체로 세 가지 동기에서 한국독립과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인식하고 지원했다.
첫째는 한국이 전통적으로 중국의 속방이었으며 한국인들이 중국인들과 유사한 민족이고 동일한 문화를 가졌다고 보는 그릇된 인식에서였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한국 인식은 독립운동 지원을 이끌어 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이후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독립운동 및 관련 조직의 독자성을 부인할 수 있는 장애요인이 되기도 했다.
둘째로는 한반도의 위치가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일본, 또는 중국과 소련(러시아) 사이에 위치하여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한국을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국으로 존재케 하여 일본이나 소련을 견제케 하자는 주장인 것이다. 1894년의 청일전쟁이나 1904년의 러일전쟁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을 어느 한 강대국이 장악하는 경우 중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고 아시아의 평화가 유지되지 못했다고 인식한 것이다. 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또 중국의 안보유지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한국을 독립자주국가로 만들어 세력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이러한 인식은 1940년대 전반기 소련의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중국동북지방이 위협받는 것을 깨닫고 중국정부의 영향력이 작용하는 친중 반공국가로 만들려는 의도와 연관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한국독립운동가들이나 단체를 지원하면 실제로 그들의 대일항전에 유익하리라는 실질적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국민당 요인 중의 한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주가화가 국민정부 총통 장개석과 공상희 부위원장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국민정부 고위층의 한인 독립운동 지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말하자면 대일항전 전략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국민당 관계자들의 한국문제 인식은 대체로 종전후 한국이 독립국가로 존재하여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거의 일치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그 동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문화적역사적 친밀감과 지정학적 조건에 따른 공동운명체 의식, 그리고 이해관계 일치에 따른 중국측의 필요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즉 독립국가로 존재하는 한국이 중국의 안보에 중요하며 일정하게 완충지대 역할을 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인식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고정휴(2000),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합정부 수립운동에 대한 재검토, 한국역사연구회
▷ 권영건(1992),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삼균주의, 삼균학회
▷ 김희곤, 고정휴 외 3명(2009), 제대로 본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식산업사
▷ 이연복(198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그 변천, 경희대학교사학회
▷ 오세종(199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가건설론, 계명대학교
▷ 한시준(2006),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 삼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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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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