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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본권, 일제탄압,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서 편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파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극동인민대표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구국모험단, 대한민국임시정부 우익진영통합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본권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일제탄압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서 편찬
1. 체재
2. 권별 구성과 서술내용
1) 제1부의 구성과 한일관계사의 서술
2) 제2부의 구성과 강제병합 부당성의 서술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파원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극동인민대표회의
1. 극동인민대표회의와 한국 혁명의 과제
2. 레닌 테제의 등장과 한인 공산당 조직들의 해체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구국모험단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우익진영통합운동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좌우 민족진영이 옹호세력과 비옹호세력으로 나누어지고 있었으나,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국제정세가 급변하게 되고 이와 때맞추어 중국 국민당정부에서 좌우합작을 종영하면서 두 진영의 협동전선운동은 적극 전개되었다. 1938년 12월과 1939년 1월 중국 국민당정부가 두 차례씩이나 김구김원봉에 대해 합작을 종영한 것에 대해 1939년 5월 김구김원봉 두 사람은 동지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면서 당파를 초월한 역량 집중을 모색하였다. 이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전 민족의 역량을 집중한 統一組織의 건설을 역설하고 통일조직은 전 민족의 의견과 요구에 의한 혁명적 강령에 기초해야 함을 천명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8월 江에서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조선혁명자연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청년전위동맹이 참여한 7당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이번 회의에서 광복진선 소속 3개 단체와 민족혁명당조선혁명자연맹은 ‘單一黨’ 방식의 통일을 주장한데 비해,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은 이 방식에 반대하고 ‘聯盟體’ 방식을 주장하여 탈퇴함으로써 통일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광복진선의 3개 단체와 민족전선의 민족혁명당 · 조선혁명자연맹 등 5개 단체는 같은 해 9월 全國聯合陣線協會를 결성하였다. 하지만 결성 직후 김원봉이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내부의 반대의견을 들어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1930년대 중국지역에서 전개된 좌우협동전선운동은 결국 무산되었다. 결렬 원인은 통일신당에 참가하는 당원의 자격과 토지국유화 문제, 그리고 임시정부 위상문제 등을 둘러싼 좌우파 사이의 의견대립이 주요 이유였다.
이처럼 좌우익 민족진영의 협동전선운동이 무산된 根幹에는 임시정부의 문제가 항상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이는 우익진영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좌익진영은 독립운동의 최고기구를 현 임시정부가 아니라 새로 결성되는 單一 新黨에 두려하여 임정의 존재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정에 대한 이런 좌우 민족진영의 상반된 견해차이는 1940년대에 들어가서야 좁혀지기 시작한다.
기강에서의 좌우합작운동이 결렬된 직후 우익진영은 그동안 소극적인 지원에 그쳤던 임시정부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위상강화를 추진하면서 임정 중심의 大團結을 모색하였다. 지금까지 옹호 · 유지차원에 머물렀던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기구로 하고 이를 정점으로 새로운 독립운동을 시도하려 한 것이다. 그러한 배경에는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美日 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고조되는 등 국제정세가 한국의 독립에 호기로 작용함에 따라, 임정을 戰時體制로 재편해 자체 역량을 제고하여 위상을 강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익진영 내부에 팽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임시정부는 좌익진영과의 협동전선운동이 무산된 직후 1939년 10월부터 우익진영 내부의 통합운동을 본격화 하였다. 우익진영의 통합운동은 한국국민당 내부에서 일부 이견노출이 있었지만, 이미 ‘재건’ 한독당과 조선혁명당이 한국국민당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고, 3당 모두가 민족주의 세력들이 주도하고 임시정부를 옹호 · 유지하며 反민족혁명당이라는 공통된 입장을 갖고 있어 별 문제가 없었다. 더구나 1939년 11월 11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전시체제 대비를 위한 ‘獨立運動方略’을 결정하여 3당 통합의 연내 실현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강력히 추진되었다. 그 결과 3당 해체선언과 함께 1940년 5월 9일 3당 통합의 산물인 韓國獨立黨을 창당할 수 있었다.
우익 민족진영의 통일정당으로서 한국독립당의 창당은 임정을 주축으로 한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전개와 함께 임정의 위상강화에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Ⅸ. 결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815광복까지 상하이(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1939]충칭[重慶 , 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외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기구로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두고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를 실시하였으며 국외에 거류민단을 설치하였다. 교통부 내에는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면에 교통소(交通所)를 신설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수집, 정부문서 국내 전달, 인물발굴 및 무기수송 등의 활동을 하였다. 연통제에 따라 서울에 총판을 두고 각 도군면에 독판군감면감을 두었는데, 국내에는 9개도 1부 45개군에 조직을 두고 만주에는 3개 총판부가 있었다. 연통제의 업무는 법령 및 공문의 전포, 군인 모집, 시위운동 계획, 애국성 금 갹출운동 등 다양하였다. 연통제와 교통국은 주로 국내 북서지방에 집중되었고 강원도와 충청도 일부에서는 대한독립애국단, 중부이남에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임무를 대행하였다.
재정기반을 위해 구급의연금과 인두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하였으나 이 중 공채는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500만 달러의 공채만 성공하였다. 초기 재정의 대부분은 재미교포의 성금으로 유지되었으며, 뒤에는 장제스[蔣介石]의 원조금으로 충당되었다.
또한 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1921년 7월 사료편찬부를 설치하고 9월말 전4권의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를 완성하는 한편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다. 기관지로 《독립신문》《신대한보(新大韓報)》《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공보(公報)》등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홍보하고 소식을 국내외 각지에 알렸다. 해외의 구미위원부에서는《Korea Review》, 파리통신부에서는 《La Coree Libre》를 발행하였다.
참고문헌
◈ 김희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외 독립운동,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10
◈ 김지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제적 요소의 영향,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2010
◈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정통성, 한국사학사학회, 2006
◈ 오향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헌주의, 한국국제정치학회, 2009
◈ 윤대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운영과 독립방략의 분화, 서울대학교, 1999
◈ 현대한국학연구소 외 1명,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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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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