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력][생산력 발전][사회 생산력][북한 생산력][조선전기 생산력]생산력의 발전, 사회의 생산력, 북한의 생산력, 조선전기의 생산력 분석(생산력, 생산력 발전, 사회 생산력, 북한 생산력, 조선전기 생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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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생산력][생산력 발전][사회 생산력][북한 생산력][조선전기 생산력]생산력의 발전, 사회의 생산력, 북한의 생산력, 조선전기의 생산력 분석(생산력, 생산력 발전, 사회 생산력, 북한 생산력, 조선전기 생산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생산력의 발전
1. 중세봉건사회
2. 근대자본주의
3. 사회주의

Ⅲ. 사회의 생산력
1. 자본의 발전과 사회의 생산력
2. 자본의 적극적 측면 : 노동해방의 조건
3. 노동과 발전된 생산력

Ⅳ. 북한의 생산력

Ⅴ. 조선전기의 생산력
1. 조선전기 농업생산력의 위치
2. 조선전기 농업생산력의 추계
1) 호구당 경작면적의 추계
2) 토지생산성의 추계
3) 노동생산성의 추계

참고문헌

본문내용

인구의 관계를 검토함으로써만 이 시대 농업생산력이 처한 위치를 객관화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토지와 인구를 추계한 것을 보면 1550년에서 1875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토지면적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인구는 68%나 크게 증가하였다. 한 사람당 식량소비 수준이 동일하였다고 가정할 때, 이러한 인구증가는 곧 단위면적당 농업생산력의 증대경향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정은 조선전기 농업의 역사적 성격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른바 1550년경의 농업은 일차적으로 ‘넓은 토지를 비교적 적은 인구가 경작하였던’ 노동생산성 중심의 조방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전기 농업의 미래지향적 발전방향은 바로 토지생산성 중심의 농업으로 가는 ‘집약화의 길’일 수밖에 없었으며, 물론 그러한 발전방향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더욱 분명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러한 관점에서 조선전기 농업생산력의 기본성격을 분석해 보자. 당시의 농업은 넓은 토지 위에 부족한 노동력이 결합한 이른바 노동절약적 토지집약적 성격의 것이었으며 그러한 조건은 축력을 풍부히 구사하는 노동생산력 중심의 대농법의 우위를 보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없이 이 시대의 농업생산력을 ‘집약적’이라고만 단정해온 기존의 통념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사정은 이 시대의 농업이 ‘노동생산성에 기초한 농업에서 토지생산성에 기초한 농업으로의 전환’이란 조선시대 농업발전의 기본방향의 출발점 위에 서있음을 웅변해주는 것이라 보여진다.
2. 조선전기 농업생산력의 추계
1) 호구당 경작면적의 추계
이와같은 조선전기 농업생산력의 위치와 성격은 많은 문헌자료들을 동원한 시계열분석(time-series analysis)에서도 그대로 증명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이다. 이른바 조선전기에는 그 생산요소로서 토지보다 노동이 중요시되었으며, 생산력의 성격에서도 토지생산성보다 주로 노동생산력에 근거하고 있었음이 검증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여기에서는 아래와 같은 여러 종류의 농업생산력에 관한 시계열의 추정치들이 추계되었다.
이와 같이 추정된 시계열 자료인 ‘실제 경작면적지수’는 1인 및 1호가 경작하였던 면적이 고대(古代)에서부터 점차 상승하여 고려전기 경에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그 이후부터는 근대에 이를수록 점차 하락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토지에 비해 인구가 극히 희소하여 경작면적을 무한정 높일 수 있었던 제1기에는 축력에 기초한 대농기구가 등장하면 할수록 노동생산성이 크게 증대되면 될수록 ‘1인당 실제 경작면적’이 증대되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국토면적과 기후 및 지형조건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농지면적과 증가하는 인구라는 조건때문에 이 지수는 점차 하강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농업생산력은 점차 집약화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2) 토지생산성의 추계
다음으로 한국농업의 전 역사에서 조선전기 토지생산성이 처하였던 위치를 밝혀보자. 주지하는 바와 같이 토지생산성이란 단위 면적당의 수확량의 추이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그런데 시계열 자료를 통해 우리가 밝힐 수 있는 유일한 토지생산성은 각 시기별 수전에서의 1결당 미곡생산량에 불과하며, 이는 결부제의 각 시기별 결면적에 따라 모두 10a(약 300평)당 수확량으로 환산되었다. 또한 이 추계에서는 각각 최고생산량최저생산량과 아울러 당시의 평균적 생산량이 추계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제3기의 공법(1444) 규정에 나타난 10a당 수확량을 100으로 하여 환산한 ‘수량지수(收量指數)’를 최종적으로 추정하였다.
이 추정치를 살펴보면 한국농업의 토지생산성은 무엇보다 제1기의 말에서 제2기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가장 급격히 상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17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이른바, 제3기에서 제4기로의 이행과정에서 상승하였음으로 15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조선전기에서는 이러한 급속한 상승이 검출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조선전기에는 토지생산성의 획기적인 상승이 없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정은 조선전기가 느린 인구증가에 따라 1인당 경작면적이 축소되는 추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생산성이 완만한 상승이란 차원을 결코 넘지 않은 시기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3) 노동생산성의 추계
이 연구에서는 하야미와 루텐(Hayami & Ruttan)이 사용한 아래의 공식에 따라 노동생산성을 추계하였다. 첫 번째의 사례는 토지생산성 지수에 ‘자연인구당’ 실제 경작면적지수를 곱한 결과이고, 두 번째의 사례는 ‘자연호당’ 실제 경작면적지수를 곱한 것이다. 이 두 사례를 평균한 노동생산성의 최종추정치를 보면 노동생산성은 제2기에서 가장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부터 점차 상승하였던 노동생산성은 제2기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고, 제3기 이후에는 점차 하락세를 보이다가 제4기부터는 조금 증가하였다.
이처럼 조선전기의 농업생산력이 토지생산성보다 노동생산성에 더욱 기초하고 있었으며, 그 후 그와 같은 사정이 역전되었다는 사실은 조선전기 농업생산력의 성격규명에 적지않은 의미를 부여해준다. 이른바 조선초기에는 직영지적 농장경영에서 나타나는 노동생산성 위주의 대농법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지만, 16세기 말 이후부터는 점차 사정이 역전되어 토지생산성 위주의 소농법이 보다 우위를 갖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이러한 상황변화는 임진왜란이란 사정 때문에 그리 강력하게 전개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적어도 토지생산성이 급속하게 증대된 18세기 전까지는 여전히 노동생산성이 사회적인 생산력을 대표한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 권오윤, 북한의 생산력발전경험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 1994
◇ 스가마 쇼지 저, 정선우 역, 생산 관리 테크닉 99, 비즈니스맵, 2012
◇ 이재유, 마르크스의 생산력 개념에 대하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0
◇ 이한구, 생산력 우위론에 기초한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 철학연구회, 1996
◇ 한국사회사연구회, 현대 한국의 생산력과 과학기술, 문학과지성사, 1990
◇ F. Robert Jacobs 저, 김연성 외 2명 역, 생산관리, 한경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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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1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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