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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2차세계대전]제2차세계대전의 특성, 제2차세계대전의 전개과정, 제2차세계대전의 연합국형성, 제2차세계대전의 제2전선, 제2차세계대전의 전쟁피해, 제2차세계대전의 미소동맹(미국과 소련의 동맹)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제2차세계대전의 특성
1. 파시즘과 반 파시즘의 대결구도
2. 민족 해방 전쟁

Ⅲ. 제2차세계대전의 전개과정
1. 폴란드 침공
2. 소련의 참전
3. 미국의 참전
4. 진주만 습격과 아시아-태평양 전쟁
5. 전쟁의 끝

Ⅳ. 제2차세계대전의 연합국형성

Ⅴ. 제2차세계대전의 제2전선

Ⅵ. 제2차세계대전의 전쟁피해

Ⅶ. 제2차세계대전의 미소동맹(미국과 소련의 동맹)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총 110억 달러에 해당하는 액수가 소련에 원조되었다. 홉킨스의 모스크바 방문은 대소원조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제 그는 루즈벨트의 생각에 인식을 같이하면서 대소원조를 찬성하는 인물로 변화되어 있었다. 홉킨스의 모스크바 방문으로 미국은 지금까지의 조심스럽게 관망하던 대소정책에서 탈피하여 적극적으로 소련에 접근하는 우호정책으로 바뀌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또 루즈벨트의 개인적 차원에서 볼 때 홉킨스의 모스크바 방문은 대통령의 대소원조에 대한 내부적 관심을 외부적인 지원으로 확대 및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1941년 9월 초 홉킨스가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루즈벨트는 런던에 있는 해리먼을 대통령 특사로 임명하여 소련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탱할 수 있는지의 여부와 소련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해리먼의 모스크바행에는 친소파 번즈 장군과 페이몬 빌이 동행했으며, 국무부에서는 국무장관 헐이 제외되고 소련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에드워드 페이지(E. Page)가 유일하게 대표로 참석했다. 대소원조는 런던과 워싱턴에서 공통된 중대 사안이었으나, 이 사안을 다루는 심각성에서 영미 양국은 현격한 차이점을 노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영미 양국의 전시전략과 전후세계에 대한 대소전략의 인식에 커다란 격차를 나타내게 되었다. 이 당시 미국의 대소정책에 관한 토의를 소련이 요구하는 무기대여 품목을 아무런 조건 없이 가급적 신속하게 많이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행정적관료적 절차에 관한 무기대여를 공급한다는 차원에 머문 반면에, 영국은 소련에 대한 원조의 정책적 의미에 대해 미국보다 훨씬 심각한 정책토론이 내각회의에서 장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미국이 대소정책에서 반대급부 없는 관용을 강조했다면 영국은 호혜성을 강조하였다. 영미 양국이 소련에 반대급부로써 요구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은 소련이 그 당시 독일과의 어려운 전쟁을 감안해 볼 때, 현금으로 군수물자의 대금을 당장 지불하라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동부전선의 최전방에서 발생하는 구체적 상황과 피해, 그리고 독일군의 전술과 군사장비에 대한 정보를 소련에서 신속하게 제공해 달라는 것이었다.
Ⅷ. 결론
결국 양차 세계대전은 분리된 전쟁이 아니라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 곧 통일독일의 등장이 야기한 세력균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간기에 일어났던 일들로 인해 분명히 인식되는데 이는 곧 1차대전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음에도 구조적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음을 시사한다. 즉 1차대전 이전과 마찬가지로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독일이 다시 팽창하자 단독으로 이에 대항할 수 없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이에 연합하였다. 독일에게는 하나의 이점이 더 있었는데 제정러시아가 소련으로 대체된 후 공산주의의 이념적 지향 때문에 더 이상 영국, 프랑스와 소련의 연합이 쉽게 이루어질 수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폴란드, 체코 등은 이전에 러시아가 했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는데 다시 말해 이들은 독일에 양면작전을 강요할 만큼 강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독일문제는 제2대전을 지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유럽 내부에서가 아닌 외부에서 찾아왔다. 즉 유럽은 이미 강대국의 지위를 상실하였고, 이미 미국과 소련이 독일을 분리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양차대전 모두 결코 당사자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진행되어 결국 이와 같은 엄청난 희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소수민족들의 저항을 계속 묵인할 경우 스스로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으며 생존을 위해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였다. 독일의 경우, 이미 포위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마지막 남은 동맹이었으며 그들의 요구를 무시할 경우 완전한 고립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2차대전의 경우도 비록 히틀러와 일본은 대규모 전쟁을 계획하였으나 모두 단기전을 예상하였으며 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자 당황하고 말았다. 이렇듯 전쟁이 일단 벌어지면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그 자체의 메커니즘에 의해 진행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책임소재에 대해 보다 조심스러워질 필요가 있다. 각 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주어진 구조 속에서 항상 자신들이 택할 수 있는 대안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으며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이러한 복잡함들이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얼마나 다양한 차원에서의 노력이 요구되는지를 보여준다.
집단안보의 개념은 처음 실패하였으나 나중에 UN을 통해 보다 안정적으로 운영되어 어느 정도의 실효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처음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은 자신들의 주권이 보다 상위의 규범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혐오하였으며 따라서 국제연맹에서는 국가들을 강제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다시 시도될 때는 이에 대한 보안이 이루어졌다. 얼마 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UN은 연합군을 파견하여 참전하였으며 이는 침략국에 대한 집단적 대응이 처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국제정치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어떤 이들은 전쟁을 정치의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전쟁은 그 과정의 격렬함만으로도 당사자들의 통제를 벗어나 버릴 수 있다는 것을 20세기는 너무나 큰 대가를 통해 보여주었다. 이제 전쟁은 정치적 수단이 아니며 오히려 정치는 전쟁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은 너무나도 숭고한, 양도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강성호(2007),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체제 변동과 한미관계, 한국서양문화사학회
- 김세연(2001),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방 연합국에 의한 독일의 전후처리, 한독사회과학회
- 박권영(2010), 제2차 세계대전 시 전쟁수행기구에 대한 고찰, 대한민국 육군
- 이헌대 외 2명(2007),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화의 전개과정과 특징적 양상, 경기대학교한국산업경제연구소
- 알라스테어 핀란, 폴 콜리어 외 1명 저, 강민수 역(2008), 제2차 세계대전, 플래닛미디어
- A.J.P.테일러 저, 유영수 역(2003),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지식의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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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1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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