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론
Ⅱ 본론
1.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2. 19세기의 영국과 인도
3. 제국주의 영국의 인도통치- 정치적인 측면
4. 제국의 경제적 수익성
5. 사회문화 정책
Ⅲ 결론
Ⅳ 참고문헌
Ⅱ 본론
1.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2. 19세기의 영국과 인도
3. 제국주의 영국의 인도통치- 정치적인 측면
4. 제국의 경제적 수익성
5. 사회문화 정책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게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인 성(性)의 차이로 성차별을 받고 있던 인도 여성들에게 까지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영국 식민정부가 실시했던 사회문화정책에서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은 신사적(gentle)이고 진짜 사나이인 자신들이 인도 여성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식민정부는 인도 여성의 낮고 비참한 위상과 차별받지 않는 영국여성의 고상한 삶을 비교하면서 자신들이 지닌 남성다움과 영국인의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한편, 미개하고 야만적인 인도 남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야만적인 사람들은 여성의 지위를 떨어뜨리지만 문명인들은 여성을 고양시킨다.......힌두여성들에게 규정된 것보다 더 엄격하고 굴욕적인 종속성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옥순 책. p82.
영국인의 인식에는 살아있는 아내를 죽은 남편과 함께 화장하는 사티제도, 여자로 태어난 영아(兒)의 살해, 여자아이의 결혼과 성적이용, 과부를 학대하고 재혼을 금지하는 것 등 여성을 핍박하는 수많은 악습을 가진 인도는 야만적인 문명의 전형이었다. 영국은 무지하고 독선적인 인도 남성의 비겁하고 남자답지 못한 ‘야만적인 관습’을 구출해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그 개혁을 추진하였다. 1829년 공리주의자 벤팅크 총독은 사티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금지하였다. 사티의 강제는 살인으로 규정하였다. 일찍이 1795년과 1802년 비인도적인 여아 살해를 불법이라고 규정했던 영국 정부는 사티를 금지한 벤팅크 총독시대에 이르러서 보다 강력한 법안으로 이를 금지했다. 1856년 재혼을 허용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인도의 성서격인 전통 관습록에는 “딸이 12세가 될 때가지 시집을 보내지 않은 부모는 딸의 달거리[生理血]를 마셔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담겨 있었다. 이에 갓 10살이 되는 여아들은 부모에 의해 강제로 결혼을 해야 했다. 이에 1891년 남성다운 식민정부는 여자아이와 결혼하는 인도의 악습을 규제하고 법적 최저 결혼연령을 10세에서 12세로 올리는 법안을 제출하였다. 이 ‘연령 승낙법’은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렇게도 남자다운 영국 남성은 서양의 가치와 상충되지 않는 인도의 악습에 대해서는 눈을 지그시 감아주었다. 게다가 영국 본토에서 만연했던 마녀사냥이나 여성 참정권 운동 등에서처럼 ‘자기 여성’의 삶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고통과 굴욕적인 삶으로 점철되었다던 인도 여성을 구원하겠다는 영국 남성들의 주장은 그 순수성과 구체적 실천의지가 상당히 의심스럽다. 그렇지만 영국은 이러한 일련의 개혁적인 조치를 통해 인도 남성의 나약성과 파렴치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어린아이를 성적 대상으로 이용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인도 남성, 즉 자신들의 성욕과 집안(여성)을 제대로 다루는 능력이 부족한 검은 피부의 인도 남성들이 ‘나라는 통치(自治)한 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려하였다. 이는 또한 도덕적으로 우세한 영국 지배자의 남성다움과 영국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내용 증명이었다.
Ⅲ 결론
앞서 살핀 대로, 영국의 인도 지배는 경제적 목적에서 교역의 대상지로 출발한다. 그러나, 18C 중엽 플라시 전투와 7년전쟁을 승리로 종식시키고 나서부터는 인도무역에서 인도경영으로 “지배”의 가치를 추가했으며, 19C 중엽 세포이의 항쟁, 국내외 정세변화를 계기로 제국주의를 전면에 내걸고 인도를 식민 통치하기에 이른다.
영국 제국주의가 가장 팽창했었던 19C중반~20C초기에 이르는 100여년 간 영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고, 이 바탕에 인도가 가져다준 영향을 간과할 수가 없다.
영국에게 있어서 인도는 특별한 나라였다. 다른 지역의 영국령 제국에서의 경제효과는 기대 이하였지만, 인도는 예외였다. 즉, 상품시장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또, 자본투자 지역이자, 영국 통치계급에 지불하는 봉급 등을 통한 영국 측의 훌륭한 수익제공처가 되었다. 그리고, 인도 주변 지역과 인도를 향하는 통로 국가를 영국령으로 두어, 러시아를 견제 하는 등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제국주의 영국의 인도지배의 전형적인 모습은 1860년대 이후에 이르며, 분명해 지는데 이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제국주의의 열풍이 몰아치던 때였다.
영국의 제국주의적 인도지배의 특징을 다음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첫째, 다른 열강들과의 식민경쟁에서 대국으로서의 세력 우위를 확인, 과시하였다.
둘째, 영국내 보수당이 “제국”의 이념을 국가정책화 하였다.
셋째, “제국이 가져다 준 영광” 이라는 가치를 시민을 상대로 선거용으로 이용하여, 국내정치에 이용했다.
넷째, 19C후반에 이르러 산업혁명의 결과로 양산된 영국 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대책으로써 제국주의를 인식했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인도지배를 분야별로 보자면, 정치면에서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경제면에서는 자본의 수출, 자유주의 무역으로 인한 무역-투자 양면의 이익이 창출되었다. 사회문화면에서는 “문명화의 사명”을 표방한 적극적 간섭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상으로, 제국주의 영국의 인도지배에 대해 그 현상적인 측면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도한 본고를 정리하도록 하겠다.
Ⅳ 참고문헌
김경학 외. <<내가 알고 싶은 인도>> .서울: 한길사, 1997
박지향. <<영국사-보수와 개혁의 드라마>>. 서울: 까치,1997.
박지향. <<제국주의-신화와 현실>>. 서울: 서울대출판부, 2000.
이옥순. <<여성적인 동양이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 서울: 푸른역사, 1999.
이지수 저. <<인도에 대하여>>. 서울: 통나무, 2002.
조길태. <<인도사>>. 서울: 민음사, 1994.
발레리 베린스탱. <<무굴제국-인도 이슬람 왕조>>. 서울: 시공사, 1999.
사이먼 C. 스미스. <<영국 제국주의>>. 서울: 동문선, 1998.
에드워드 사이드. <<문화와 제국주의>>. 서울: 창, 1995.
자와할랄 네루 저, 김종철 역. <<인도의 발견>>. 서울:우물이 있는 집, 2003.
잭 스나이더. <<제국의 신화>>. 서울: 서울프레스, 1996.
EM번즈 외. <<서양 문명의 역사 3,4>>. 서울: 소나무, 2001.
“야만적인 사람들은 여성의 지위를 떨어뜨리지만 문명인들은 여성을 고양시킨다.......힌두여성들에게 규정된 것보다 더 엄격하고 굴욕적인 종속성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옥순 책. p82.
영국인의 인식에는 살아있는 아내를 죽은 남편과 함께 화장하는 사티제도, 여자로 태어난 영아(兒)의 살해, 여자아이의 결혼과 성적이용, 과부를 학대하고 재혼을 금지하는 것 등 여성을 핍박하는 수많은 악습을 가진 인도는 야만적인 문명의 전형이었다. 영국은 무지하고 독선적인 인도 남성의 비겁하고 남자답지 못한 ‘야만적인 관습’을 구출해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그 개혁을 추진하였다. 1829년 공리주의자 벤팅크 총독은 사티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금지하였다. 사티의 강제는 살인으로 규정하였다. 일찍이 1795년과 1802년 비인도적인 여아 살해를 불법이라고 규정했던 영국 정부는 사티를 금지한 벤팅크 총독시대에 이르러서 보다 강력한 법안으로 이를 금지했다. 1856년 재혼을 허용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인도의 성서격인 전통 관습록에는 “딸이 12세가 될 때가지 시집을 보내지 않은 부모는 딸의 달거리[生理血]를 마셔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담겨 있었다. 이에 갓 10살이 되는 여아들은 부모에 의해 강제로 결혼을 해야 했다. 이에 1891년 남성다운 식민정부는 여자아이와 결혼하는 인도의 악습을 규제하고 법적 최저 결혼연령을 10세에서 12세로 올리는 법안을 제출하였다. 이 ‘연령 승낙법’은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렇게도 남자다운 영국 남성은 서양의 가치와 상충되지 않는 인도의 악습에 대해서는 눈을 지그시 감아주었다. 게다가 영국 본토에서 만연했던 마녀사냥이나 여성 참정권 운동 등에서처럼 ‘자기 여성’의 삶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고통과 굴욕적인 삶으로 점철되었다던 인도 여성을 구원하겠다는 영국 남성들의 주장은 그 순수성과 구체적 실천의지가 상당히 의심스럽다. 그렇지만 영국은 이러한 일련의 개혁적인 조치를 통해 인도 남성의 나약성과 파렴치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어린아이를 성적 대상으로 이용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인도 남성, 즉 자신들의 성욕과 집안(여성)을 제대로 다루는 능력이 부족한 검은 피부의 인도 남성들이 ‘나라는 통치(自治)한 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려하였다. 이는 또한 도덕적으로 우세한 영국 지배자의 남성다움과 영국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내용 증명이었다.
Ⅲ 결론
앞서 살핀 대로, 영국의 인도 지배는 경제적 목적에서 교역의 대상지로 출발한다. 그러나, 18C 중엽 플라시 전투와 7년전쟁을 승리로 종식시키고 나서부터는 인도무역에서 인도경영으로 “지배”의 가치를 추가했으며, 19C 중엽 세포이의 항쟁, 국내외 정세변화를 계기로 제국주의를 전면에 내걸고 인도를 식민 통치하기에 이른다.
영국 제국주의가 가장 팽창했었던 19C중반~20C초기에 이르는 100여년 간 영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고, 이 바탕에 인도가 가져다준 영향을 간과할 수가 없다.
영국에게 있어서 인도는 특별한 나라였다. 다른 지역의 영국령 제국에서의 경제효과는 기대 이하였지만, 인도는 예외였다. 즉, 상품시장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또, 자본투자 지역이자, 영국 통치계급에 지불하는 봉급 등을 통한 영국 측의 훌륭한 수익제공처가 되었다. 그리고, 인도 주변 지역과 인도를 향하는 통로 국가를 영국령으로 두어, 러시아를 견제 하는 등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제국주의 영국의 인도지배의 전형적인 모습은 1860년대 이후에 이르며, 분명해 지는데 이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제국주의의 열풍이 몰아치던 때였다.
영국의 제국주의적 인도지배의 특징을 다음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첫째, 다른 열강들과의 식민경쟁에서 대국으로서의 세력 우위를 확인, 과시하였다.
둘째, 영국내 보수당이 “제국”의 이념을 국가정책화 하였다.
셋째, “제국이 가져다 준 영광” 이라는 가치를 시민을 상대로 선거용으로 이용하여, 국내정치에 이용했다.
넷째, 19C후반에 이르러 산업혁명의 결과로 양산된 영국 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대책으로써 제국주의를 인식했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인도지배를 분야별로 보자면, 정치면에서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경제면에서는 자본의 수출, 자유주의 무역으로 인한 무역-투자 양면의 이익이 창출되었다. 사회문화면에서는 “문명화의 사명”을 표방한 적극적 간섭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상으로, 제국주의 영국의 인도지배에 대해 그 현상적인 측면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도한 본고를 정리하도록 하겠다.
Ⅳ 참고문헌
김경학 외. <<내가 알고 싶은 인도>> .서울: 한길사, 1997
박지향. <<영국사-보수와 개혁의 드라마>>. 서울: 까치,1997.
박지향. <<제국주의-신화와 현실>>. 서울: 서울대출판부, 2000.
이옥순. <<여성적인 동양이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 서울: 푸른역사, 1999.
이지수 저. <<인도에 대하여>>. 서울: 통나무, 2002.
조길태. <<인도사>>. 서울: 민음사, 1994.
발레리 베린스탱. <<무굴제국-인도 이슬람 왕조>>. 서울: 시공사, 1999.
사이먼 C. 스미스. <<영국 제국주의>>. 서울: 동문선, 1998.
에드워드 사이드. <<문화와 제국주의>>. 서울: 창, 1995.
자와할랄 네루 저, 김종철 역. <<인도의 발견>>. 서울:우물이 있는 집, 2003.
잭 스나이더. <<제국의 신화>>. 서울: 서울프레스, 1996.
EM번즈 외. <<서양 문명의 역사 3,4>>. 서울: 소나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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