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식민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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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의 식민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序論


Ⅱ. 本論

1. 植民史學論
(1) 日鮮同祖論
(2) 滿鮮史觀
(3) 古代社會에서의 ‘朝鮮半島植民地論’
(4) 停滯後進性論

2. 反植民史學論 - 民族主義 歷史學
(1) 申采浩의 시기별 현실인식과 역사관
① 제 1단계(1905년-1908년)
가. 社會進化論的 현실인식
나. 역사서를 통해 본 역사관
② 제 2단계 (1909-1920년대 초반)
가. 현실인식
나. 歷史書를 통해 본 歷史觀
③ 제3단계( 1920중반 이후-1936)
가. 현실인식
나. 歷史書를 통해 본 歷史觀
④ 시대적 제약성
⑤ 史學史적 의의
(2) 朴殷植의 國魂論적 현실인식과 역사학
① 제 1단계( 1905년-10년)
② 제 2단계 (1911년)
③ 제 3단계(1915년)
④ 제 4단계( 1920년대)
⑤ 시대적 제약성
⑥ 史學史적 의의
(3) 鄭寅普의 역사관과 한계성
① 역사관
② 한계성
(4) 文一平의 역사관과 한계성
① 역사관
② 한계성

3. 民族主義 歷史學의 限界와 意義


Ⅲ. 結論



【 參 考 論 文 】

본문내용

었다.
⑥ 史學史적 의의
그의 역사학이 갖는 사학자적 의의는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첫째 역사 서술 체제 면에서 전통적 서술 체제를 탈피, 인과관계에 따라 사실을 설명 분석 비판하는 근대적 역사 서술 체제를 개척하였던 바, <韓國痛史>는 근대적 역사서술방법에 따른 최초의 시대사였다.
둘째, 민족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역사학을 수립함으로써 저항주의적이며 개혁적인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전통을 수립했다. 특히 國魂論的 역사인식에서 나타난 정신사관적 요소는 이후 민족주의적 역사학의 기본적인 특성으로 자리잡게 된다.
셋째, 박은식의 투철한 실천적 관심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제고하였으며, 이에 따라 대부분의 민족주의적 역사학자들이 고대사 연구에 집중한 것과는 달리 근대사 연구에 개척적인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의 근대사 연구는 질과 양 면에서 모두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근대사 연구의 토대를 이루는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박은식 사학의 4단계에 걸친 발전과정은 한국 근대 민족주의 운동의 발전과정과 궤를 같이하면서, 한국 민족주의의 형성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하였다.
(3) 鄭寅普의 역사관과 한계성
① 역사관
한학자이면서도 민족주의 역사학자였던 정인보는 박은식의 국혼(國魂), 신채호의 낭가사상(郎家思想)등에서 영향을 받고, 국내의 실증 사학에 반발한 것이 동기가 되어 이른바 ‘얼史觀’을 세우고 식민사론에 맞섰다. 그에 의하면 역사의 원동력은 얼 곧 민족혼이며 역사 연구의 목적은 바로 이 민족혼을 찾는 데 있으므로 얼을 찾는 일과 무관한 사실의 실증은 무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단군문제, 한사군 문제에 있어서도 해외 민족주의 역사학의 說을 이어 받아 단군설화를 신화부분과 사실 부분으로 나누어 일본인들의 神話說에 맞서고 있으며, 漢四郡의 韓半島 內在說을 상세한 논증을 통하여 부인하였다. 漢四郡 위치에 대한 그의 정력적인 고증은 바로 식민사학론에의 대항이었던 것이다.
② 한계성
국내의 식민지 치하에서 산 정인보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심한 정신주의적 역사 인식에 빠져 있었다. 그는 역사의 법칙적 발전을 이론적으로 천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 인식 범위를, 안으로 31운동 이후 급격히 성장해 간 농민 운동 노동 운동의 역사성으로까지 확대시키는 문제, 밖으로 식민지 치하에서의 민족사의 위치를 세계사와 연결시키는 문제 등으로 넓혀 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다만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식민사론에 매몰되지 않기 위한 민족혼의 유지를 사론의 최대 목적으로 부각시켰던 것이다.
(4) 文一平의 역사관과 한계성
① 역사관
文一平은 일본인들의 南韓經營說, 만선사관 등에 대항하면서 고대에 있어서의 한반도 문화의 일본 및 만주지방 지배를 주장하였다. 즉 한반도의 문화가 한편으로는 일본을, 또 한편으로는 만주를 포용하여 극동 지방에서의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였다고 설명함으로써, 고대에 있어서의 日本의 韓半島 支配說을, 그리고 만선사관을 뒤집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다른 민족주의 역사학자에 비하여 역사적 관심이 훨씬 넓었다. 그는 역사에서의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른바 반역아의 역사적 역할을 긍정하는 한편, 민중 세계의 역사적 역할에까지 어느 정도 생각이 미쳤다.
② 한계성
그의 역사적 관심은 넓었지만, 식민사관의 이른바 정체후진성론을 극복하려는 학문적 자세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했고, 민족의 문화사적 우월성을 강조하면서도 ‘계급의 교대’가 없었던 조선사는 ‘문화를 떠나 정치로만 볼 때 조선사는 일종의 惰氣(타기, 게으른 마음이나 기분)의 연속이다.’라고 하여 정치사면서 守拙(수졸, 어리석음을 지키고 본성(本性)을 고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3. 民族主義 歷史學의 限界와 意義
중세의 사대주의적 역사관을 극복하고 성립된 근대 역사학으로서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시민 계급적 역사학으로서 국민주의 및 국민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역사학으로 발전할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 사학의 성립 초기에 식민지화함으로써 시민 계급적 민족주의 역사학은 식민주의론에 대항하는 반식민주의 역사학으로, 민족해방운동에 이바지하는 역사학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그것에서 가장 높은 의의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살면서 민족사를 연구 및 서술하는 최대의 목적을, 식민사론의 피해를 극복하고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데 두었던 민족주의 역사학은, 그 때문에 심한 정신주의적 역사 인식에, 그리고 일종의 鬪爭主義的 역사 인식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지난날 민족사의 영광스러웠던 부분을 부각시키고 강조하는 일종의 復古主義的 방법론에 빠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의 실증성의 취약성도 면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민족주의 역사학이 가진 취약성은 곧 식민지 시기 역사학이 가진 특성에서 온 것으로 민족주의 역사학이 가진 특성인 동시에 한계성이기도 했던 것이다.
Ⅲ. 結論
이른바 식민사학이 그 지배 목적을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 역사를 왜곡했던 ‘植民史論’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역사학은 현실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정면으로 맞섰음을 알 수 있었다.
역사학 연구가 단순한 사실의 구명에만 한정되지 않고 민족사적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그것을 위한 일정한 문제의식 내지 史觀을 수립하고 이를 논증하기 위한 연구 작업을 진행할 때 비로소 그 학문사적 위치를 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때, 민족주의 역사학은 여러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시대적 요구였던 反植民史論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바, 근대 史學史에 중요한 위치를 점할 수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서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 줌으로써, 독립운동사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시대 피지배 민족의 역사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투철하게 고민하고 실천했던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역사학이 자기 시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성찰하는 데 귀감이 될 것이다.
【 參 考 論 文 】
김기승, 박은식,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下), 창작과 비평사
박찬승, 신채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下), 창작과 비평사
강만길, 일제시대의 반식민사학론, 韓國史學史의 硏究, 韓國史硏究會 編, 1985, 乙酉文化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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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9.23
  • 저작시기2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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