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의 시간 이해 - 몰트만의 우주적 종말론에 대한 비판들, 몰트만의 시간, 자연과학적 시간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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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몰트만의 시간 이해 - 몰트만의 우주적 종말론에 대한 비판들, 몰트만의 시간, 자연과학적 시간 이해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몰트만의 우주적 종말론에 대한 비판들

3. 몰트만의 시간

4. 분석: 자연과학적 시간 이해를 바탕으로

5. 나가는 말

본문내용

는 영이 새로운 육으로 현현하는 것으로서의 변화가 되어야 한다. 그가 말하는 전이란 곧 새로운 육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온 우주적 종말론을 지향하는 몰트만에게 있어서는 인간에게만 적용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새로운 육체를 덧입음을 우주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세계 자체의 초월적 조건들과 세계의 기초의 변형을 뜻한다는 것이 표현되어야 한다: 하나님 자신이 세계에 대한 그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위르겐 몰트만, 같은 책, 465.
그리고 “신격화”의 의미를 인간이 하느님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인간이신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통하여 하느님 본성의 속성들에 참여하는 것에서 찾음으로써 신격화가 우주적 지평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그리고 이러한 동방적 개념의 신격화를 서방적 개념인 무화와 연결하여 생각함으로써 우주적 새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적 구원자 자신이 이 땅 위에 은폐된 채로 현존한다면, 땅은 그의 그리고 우리의 미래의 담지자가 된다. 그렇다면 땅과 사귐 없는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에 대한 희망은 땅에 대한 사랑과 땅을 위한 희망을 포괄한다.” 위르겐 몰트만, 같은 책, 477.
차안의 불완전한 세계, 희망으로 돌입하는 미래에 열려있는 세계는 하느님 영이 은폐되어서 현존하므로 불완전하며 무화될 것이지만, 새 창조의 변화를 통하여 하느님 영이 완전히 드러나는 상승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보증하는 것은 하느님의 신실함,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지만 본고가 생각하기에, 이런 식으로 불연속성을 해결하는 변화라는 것은 또 다른 불연속성을 야기한다. 새 창조를 전후한 하느님의 영이 불연속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필연적으로 창조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을 나눔으로써 전자를 후자보다 못한 것으로 설명하게 되는 몰트만의 영 이해의 배후가 되는 것이다. 도대체 이렇게 하느님의 영을 이분해야하는 정당성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다른 한편 그의 변화는 선적 시간을 순환적 시간으로 돌리는데, 이렇게 해서 영원이라는 것의 표상을 순환적 시간으로 돌린 것이다. 과학적 이해에 있어서 영원이라는 말은 여전히 시간적인 개념이다. 무엇인가가 지속된다는 것은 이미 시간적인 언술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의 지속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무상한 것을 파악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영원은 반드시 영원한 무상성을 전제로 하여 파악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신학에서 영원과 시간을 대립시키는 방식은 과학적인 차원과는 다른 방식, 다른 의미로 진술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신학에서는 영원이 완전한 것, 혹은 하느님의 전적인 드러남에 대한 표상이며 시간이란 그에 대칭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몰트만이 변화에 대해서 사용하는 시간의 개념은 영원에 대칭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크로노스의 시간에 대한 카이로스의 시간의 성취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몰트만이 시간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의미하는 바는 적어도 세 가지가 된다. 영원의 대칭으로서의 시간, 크로노스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 그런데 그는 곧장 크로노스의 시간을 영원의 대칭으로서의 시간과 같은 것으로 보는데, 앞서 말했듯이 크로노스의 시간은 영원과 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영원은 늘 크로노스를 필요로 한다. 이렇게 볼 때 순환적 시간이 선적 크로노스의 시간을 대치한다는 것의 의미가 불분명해지고 만다. 아무리 순환으로서 완전한 역동성을 표현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크로노스의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시간이 순환한다니? 시간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선적 개념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시간의 순환이 아니라면 시간을 가능케 하는 움직임이 반복된다는 뜻일 텐데, 그렇다면 이는 매우 단조로운 삶을 의미하게 된다. 완전한 삶은 반복되는 삶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글쎄, 본인은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5. 나가는 말
이상으로 몰트만의 시간이해를 중심으로 그의 신학을 비판해 보았다. 이 비판을 통해서 그의 신학적 담론이 과학자들과 대화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창조와의 관계에서 자연신학을 통하여 지혜롭게 된” 위르겐 몰트만, 『과학과 지혜』, 51.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만나게 하는 “배워야할 지혜” 위르겐 몰트만, 『과학과 지혜』, 53.
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한 듯하다. 사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미 너무 멀리 떠나온 두 학문 간의 대화는 마치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대화를 시도하려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마당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과학적 이해가 충분히 적나라하게 신학자들에게 번역되어 알려지는 것이며, 신학자들의 언어가 과학자들에게 충분히 감동적인 메시지로 귀 기울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통합의 길을 모색하기 보다는 우선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겸손히 귀를 기울이는 수양적 자세가 서로에게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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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__,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김균진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
_____________, 『희망의 신학』, 이신건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한국조직신학회 편, 『희망과 희망 사이』, (서울: 한들출판사, 2005)
Polkinghorne, John C., The God of Hope and the End of the Worl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2.
전일동, “양자역학의 세계상”, 『과학사상』1994 여름, 5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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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1.03
  • 저작시기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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