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학의 이해] 경주남산 설화와 전설 조사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민속학의 이해] 경주남산 설화와 전설 조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경주 남산
1. 남산 설화
2. 광덕과 엄장의 설화
3. 문수보살에게 혼이 난 경흥스님의 이야기
4. 도심왕릉 설화 (고려의 첩자 풍수쟁이의 계략)
5. 피리소녀의 사랑이야기가 깃든 상사바위
6. 부처의 세계로 가는 열반골
7. 신라판 노아의 홍수 일천 바위
8. 부엉골 설화.
9. 칠형제의 어머니 사랑 효불효교
10. 김유신과 천관여인
11. 서출지 전설
12. 포석정
13. 석가사에 얽힌 비피바위이야기

본문내용

님께는 큰 불효를 짓는 일이지만 살아 계신 어머님을 위해 다리를 놓아 드리자." 형제들은 의기 투합해 아무도 모르게 다리를 놓았으며 나중에서야 일곱 아들이 다리를 놓게된 사실을 안 어머니는 대성통곡하며 크게 뉘우쳤다. 이 다리는 살아 계신 어머니에겐 효도를, 돌아가신 아버지에겐 불효를 한 다리라 해서 효불효교라 불렀다. 일곱 형제가 놓았다해서 칠자교라 부르기도 했다.
효불효교는 다 헐어져 당시의 석재만이 그 자리에 어지럽게 널려있다.
* 출처 : 디지털 남산(주)매일신문사
10. 김유신과 천관여인
천관사 터
김유신이 청년시절 천관이라는 기생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느 날 아들을 불러 "이 어미의 소원이 있다면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공을 세워 나라를 지키는 대들보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술집에 드나들며 천한 여자들과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장래에 무엇이 되겠느냐." 하고 꾸짖었다. 김유신은 그 후 천관의 집에 발길을 끊고 심신 수련에 몰두했다. 어느 날 유신은 친구의 초대를 받아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한 채 말을 타고 오다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말은 저 혼자서 집으로 향했다. 바로 천관의 집이었다. 천관은 너무도 반가이 맞이했다. 그러나 잠에서 깬 유신은 맹세를 저버린 기막힌 사태를 깨달아 단숨에 칼을 뽑아 사랑하는 애마의 목을 내리쳤다. 그 후 오랫동안 천관은 유신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천관은 그리움에 사무쳐 고민하다가 끝내 목숨을 끊었다. 김유신은 18살에 검술이 통하여 국선이 되었다. 660년에 백제의 항복을 받고 668년에는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백발이 성성한 태대각간 김유신은 그제서야 사랑하던 천관의 넋을 기리고자 천관사라는 절을 지어 천관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신라 최고의 화랑 김유신에게도 이런 사랑 이야기가 천관사 터에 전해온다. 그러나 최근 천관여인은 기생이 아니라 국사에 참여한 신분이 높은 여자라는 논쟁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석탑재가 지금까지 그대로 방치돼 왔지만 최근 들어 국립 경주 문화재 연구소에서 천관사 터 발굴 작업을 시작해 그 실체가 기대되고 있다. 김유신의 집터가 있던 곳엔 당시의 우물터인 재매정이 남아있다. 김유신은 전장에서 잠시 돌아왔을 때 이 물을 마시며“물맛이 아직도 그대로구나”하며 전의를 다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화강석으로 네모나게 쌓은 건축기법은 첨성대 상단의 모습과 비슷해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물 안엔 아직도 물이 고여 있다.
* 출처 : 디지털 남산(주)매일신문사
11. 서출지 전설
서출지
신라 21대 소지왕이 서기 488년 정월 보름날 행차에 나설 때다.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말했다. "이 까마귀 가는 곳을 살피십시오" 왕은 장수를 시켜 따라가게 했다. 동남산 양피촌 못가에 이르러 장수는 그만 까마귀를 놓쳐 버렸다. 이때 갑자기 못 가운데서 풀옷을 입은 한 노인이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장수께서는 이 글을 왕에게 전하시오" 노인 은 글이 써진 봉투를 건넨 뒤 물 속으로 사라졌다. 왕이 봉투를 받아보자 '열어보면 두사람이 죽고 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 라고 적혀있었다. 이를 본 신하가 말 했다. "두사람은 평민이고 한사람은 왕을 가리킴이오니 열어보시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왕은 신하의 조언에 따라 봉투를 뜯었다. '사금갑(射琴匣)' 즉 '거문고 갑을 쏘아라' 라고 적혀있었다. 대궐로 간 왕은 왕비의 침실에 세워둔 거문고 갑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거문고갑 속에는 왕실에서 불공을 보살피는 승려가 죽어있었다. 승려는 왕비와 짜고 소지왕을 해치려한 것이었다. 왕비는 곧 사형되었으며 왕은 노 인이 건네준 봉투 덕분에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이 연못은 글이 적힌 봉투가 나온 곳이라 해서 서출지라 부른다. 소지왕 10년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40년 전이다. 신라 눌지왕 시대에 묵호자가 불교를 전하러 왔으나 펴지 못했다. 소지왕 시대 아도 스님 역시 불교전파에 실패했 다. 법흥왕 15년 이차돈의 순교로 비로소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이다. 당시 신라 귀족들은 민속신앙 특히 조상을 섬기는 신앙이 강해 쉽게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서출지의 전설은 전통적 민속신앙속에 새로운 불교문화가 전래되는 과정에 빚어지는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12. 포석정
포석정 터
포석정은 옛날에 신라에서 임금이 벼슬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후백제의 견훤의 기습에 경애왕이 항복하고 견훤에게 술을 따른뒤 자살시키게 한 곳이라고 합니다. 또, 신라(新羅) 헌강왕(憲康王)이 포석정에서 놀이하고 있을 때, 남산(南山)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자 왕도 따라서 추었는데, 이 춤에서 어무상심무(御舞詳諶舞)라 하는 신라춤이 만들어 졌다고 전해 오기도 합니다.
13. 석가사에 얽힌 비피바위이야기
망덕사와 서남산 비파골의 비파바위에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효소왕이 즉위(692)하여 망덕사를 완성하고 낙성회를 열고 왕이 친히 나가 공양하는데, 허술한 옷을 입은 한 비구가 몸을 구부리고 서서 청했다. "빈도도 이 재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왕은 그에게 말석에 참여하도록 허락했다. 재가 끝나자 왕은 그를 희롱조로 말했다.
"그대는 어디 사는가?"
"비파바위에 살고 있습니다."
"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는 말을 하지 말라."
중도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진신 석가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고 몸을 솟구쳐 하늘로 떠서 남쪽을 향해 날아갔다. 왕은 놀랍고 부끄러움에 동쪽 언덕으로 달려 올라가 그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멀리서 절하고 사람을 시켜 찾게 했다. 그
비파 바위
는 남산 삼성곡, 혹은 대적천원이라고 하는 곳에 와서 바위 앞에 지팡이와 바리때를 벗어 놓고 숨어 버렸다. 사자가 돌아와 복명하자 왕은 석가사를 비파바위 밑에 세우고, 그가 숨어 버린 바위 위에 불무사를 세웠다. 비파바위와 두 절터는 현재 서남산 비파골에 있다.
출처: 삼국유사(三國遺事 第四卷 感通 第七 眞身受供)
  • 가격2,3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14.01.16
  • 저작시기2014.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02319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