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춘의 역사 - 매춘의 기원, 전통시대 매춘(고려시대, 조선시대, 식민지 시대, 현대), 공창, 양공주(해방이후), 춘화도, 춘화의 유입과 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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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매춘의 역사 - 매춘의 기원, 전통시대 매춘(고려시대, 조선시대, 식민지 시대, 현대), 공창, 양공주(해방이후), 춘화도, 춘화의 유입과 퇴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매춘의 기원

2. 전통시대 매춘
1) 고려시대
2) 조선시대
3) 식민지 시대
4) 현대

3. 공창

4. 양공주(해방이후)

5. 춘화도

6. 춘화의 유입과 퇴락

참고문헌

본문내용

엑스에서 흘러나온 외제품 판매책, 암달러상, 포주 등을 핵으로 하여 확산되어 나갔던 기지촌 문화는 그 주변부에 양공주들을 주요 고객으로 유인하는 업종들이 하나둘씩 자리잡아 나갔다. 미장원, 세탁소, 양복점, 사진관, 기념품점, 초상화점, 당구장, 국제결혼 중개업 사무소 등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즉 군정이 시작되자마자 여자가 조달되었고, 여자를 필요로 하는 미군들의 주변부에 이들 남녀를 동시에 주 고객으로 유인하려는 상업주의가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일제가 남기고 간 매춘 문화의 흔적은 이렇듯 급기야 해방이후에도 고스란히 남아 빈곤을 타파하고 생존수단을 강구해 나가려는 이 땅 부녀자들의 좋은 대안 노릇을 했고, 또 그녀들 주변부에 기생하여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가고자 원했던 계층들에게 여자의 ‘성’을 팔아야 하는 슬픈 먹이사슬이 되었다. 서울을 둘러싼 전후반 경기도 지역 기지촌의 미군 매춘문화는 이제 송탄(쑥고개)을 거쳐 오산, 대전, 대구, 왜관, 군산, 목포, 진해를 돌아 앞서 지적했던 부산지역에 이르기까지 전국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주둔부대의 생명과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은 강력한 관 주도의 경제 하여 매춘 또한 ‘조국근대화의 주역’이라는 억지 논리가 피기 시작한다. 이는 70년대 개발독재, 80년대 관광기생 출현단계에 이르면 더욱 노골화 된다. 권력이 매춘을 미호하고, 국가가 매춘을 묵인하며 관광정책이란 미명 아래 일방적으로 매춘을 장려하기 시작함으로써 이후 매춘의 양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5. 춘화도
춘화란 대체로 남녀의 성 풍속 장면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따라서 춘화에는 남녀간의 성 관계 장면을 여과 없이 묘사한 것도 있고, 남녀가 만나는 즐거움 자체를 그린 그림도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춘화에는 풍속화가로 유명한 김홍도나 신윤복의 작품이 상당수 있어 우리들을 놀라게 한다. 주로 교과서를 통해 접했던 이 들이 이런 그림을 그렸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지만, 인간의 삶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성'도 풍속화의 대상으로 예외가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당대 최고의 풍속화가였던 김홍도와 신윤복의 작품으로 전하고 있는 이들 춘화들은 사실성 과 예술적 격조를 갖춘 작품들이다. 이들 춘화도의 공통점은 이런 유의 그림이 빠지기 쉬운 음란 외설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높은 회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춘화와 비교해보면 이들의 예술성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이들 춘화도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성교 장면을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중국처럼 교범적이거나 도식적으로 처리하지도 않았으며 일본처럼 지나치게 격정적이고도 극적으로 꾸민 흔적 없이 진솔하게 성애를 나누는 정감있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그림이 모두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정욕을 해소하거나 성희를 즐기기 위한 성적 대상으로서 사회적 특수관계로 결합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단순히 성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로 그친 것이 아니라 사회풍자를 위한 시각으로 성 문제를 바라본 것이다.
이들이 그린 춘화는 인간의 욕정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사의 단면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기도 하다. 뒤뜰에서 벌어진 처녀, 총각의 성희 장면에 배치된 나무절구와 절구공이, 절에 온 여인과 노승의 성행위를 문틈에서 구경하는 승방의 동자승, 초가 마루에서 옛 기억을 살려 관계를 시도해 보는 늙은 남녀 등 다양 한 계층을 등장시켜 시대상을 드러낸다.
춘화에 나오는 배경들은 대체로 집안이나 야외인데 특히 야외에서의 정사 장면은 중국과 같이 집안의 정원이 아닌 경승처가 그 배경이 다. 뛰어난 자연환경 속에서 기생들과 진탕 놀 면서 일어난 춘정을 현장에서 충족시키는 광경은 조선후기의 성풍속도가 중국과 일본보다 좀 더 서정적 양상을 띄었음을 보여준다. 조선후기 성풍속도는 이와 같이 남녀 관계의 비밀스런 세계를 구체적이고도 적나라하게 그려내면서 독특한 예술의 경지를 이룩한 것이다.
6. 춘화의 유입과 퇴락
우리나라에 향락용 춘화가 유입된 것은 늦어 도 고려시대부터라 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주된 관심사의 하나인 춘화의 유입이 그 이전 부터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밝혀줄 자료가 아직 발견 되지 않고 있다. 단지 원나라 왕실과 밀접했던 고려 왕실이나 귀족층을 중심으로 이러한 그 림들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물론 이때의 춘화는 몇몇 특권층만이 향유했던 외국문화였을 것이다. 본격적인 유입은 청을 통해 외국의 문물이 한 창 들어오기 시작한 17~8세기경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인조년에 중국 사절단의 선물 품목에 상아로 만든 춘의상이 포함 되어 있어 돌려보낸 적이 있으며, 숙종 때에는 춘화를 그려넣은 도자가기 중국으로부터 밀반 입되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중국과 일본의 춘화가 매우 유행했다. 그런데도 이들 춘화의 유입이 늦어진 것 은 조선시대 특유의 엄격한 보수적 성의식이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 기 이래 중국과 일본에서 널리 성행했던 춘화가 우리 사행원들에 의해 빈번히 목도되면서 국내로의 유입을 막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춘화는 18~19세기 서울을 중심으로 소비층을 형성하면서 본격적인 자체 제작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기방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유흥문화의 일종인 춘화일지라도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우리만의 정서를 담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본능적 욕정의 세계를 풍류적 삶의 세계로 승화시켰던 조선후기 춘화는 구한말에 이 르러 급속히 퇴락한다. 이 무렵부터 일본 창녀의 진출과 도시 매음이 번창하면서 일본의 값 싼 춘화류가 상당향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춘화> 이에 따라 춘화는 자극적인 음란성만이 강조되어 예술적 품격은 사라지고 저질화의 길로 들어섰다. 예술적 가치를 상실하고 단순한 도색물로서의 의미만 남은 춘화는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참고문헌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정성희, “조선의 성풍속” 가람기획
이성숙, “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우 담론을 위하여”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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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4.05.27
  • 저작시기2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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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19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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