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운동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만주지역의 항일유격투쟁, 만보산 사건, 태평양 노조 사건, 농촌진흥운동, 조선어 학회, 조선민족혁명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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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민족운동사]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운동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만주지역의 항일유격투쟁, 만보산 사건, 태평양 노조 사건, 농촌진흥운동, 조선어 학회, 조선민족혁명당 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3. 만주 지역의 항일 유격 투쟁

4. 민족 연합 전선의 형성 노력

5. 만보산 사건

6. 태평양 노조 사건

7. 농촌 진흥 운동

8. 조선어 학회

9. 진단 학회

10. 조선 민족 혁명당

11. 일장기 말소 사건

12. 맺은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학교 직원까지 동원했다. 10년 안에 농가 부채를 정리하고 식량 부족을 없앤다는 목표를 내걸고, 방법으로는 근로 정신 발휘, 여성 노동 장려, 부업 장려를 강조했다. 또 조선 농민이 못사는 이유가 게으르고 무지하며 국가관이 없기 때문이라면서, 일본 정신과 풍습을 익혀야 한다는 정신 운동도 주장했다. 행동 방침으로 일장기 게양, 신사 참배, 일본의 전통의상색인 검은색 옷을 입을 것을 강요함으로써 황국 신민화의 방편으로 이용했다.
농촌 진흥 운동은 3.5%에 불과한 지주가 60%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고 농민이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고 있다는 현실을 무시하고 진행된 것으로, 조선 농촌의 구제라는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결국 부업과 여성 노동 등으로 조선 농민의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고, 항일 의식을 억누르려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던 것이다. 1936년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이 퇴임하면서 농촌 진흥 운동도 끝이 났다.
8. 조선어 학회
언문으로 천대받던 한글이 국문이라 일컬어진 것은 개항 이후부터다. 이후 지석영,주시경 등이 한글 연구를 활발히 했으나, 일제 강점기에 들면서 다시 위축되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우리말 신문이 발간되자 연구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1921년 조직된 조선어 연구회는 연구 발표회강습회강연회 등을 열어, 한글을 정리통일하고 민중을 대상으로 교육 운동을 벌였다. 조선어 연구회는 1927년부터 기관지 한글을 발간하여 국어 연구에 크게 공헌했다. 1929년에는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시작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중일 전쟁 이후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이 폐지되는 등 민족 말상 정책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우리말 연구는 탄압을 받으면서도 계속되었다. 조선어 연구회는 193년 조선어 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는 한편, 신문사와 협조하여 전국에서 광범위하게 국어 강습회를 열었다. 1942년에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몇십명의 회원이 구속되었다. 1949년 한글 학회로 개칭했다.
9. 진단 학회
일제 강점기 일본 어용 학자들은 우리 역사를 왜곡하여 이른바 식민주의 사관을 주장했다. 곧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외세의 지배를 받았으며 스스로는 발전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통해 발전했다는 타율성론정체성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정인보신채호박은식안재홍문일편백남운을 비롯한 역사학자들은 각종 저서를 통해 식민 사관을 공격하고 민족 정신을 고취했다. 진단 학회는 이병도김윤경이병기를 비롯해 서구식 대학 교육을 받은 신진 역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인 연구자들의 단체인 청구 학회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했다. 신채호박은식을 비롯한 민족주의 역사 학자들의 연구가 강렬한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주관적인 성격이 강함에 비해, 진단 학회의 회원들은 사실적이고 실증적인 연구 경향을 보였다. 진단 학회는 회보 진단 학보를 발행했다. 1943년 9월 강제 해산당했으며, 해방후 활동을 재개했다.
10. 조선 민족 혁명당
1930년대 초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세력들은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통일 전선을 형성하려는 운동을 다시 추진했다. 1932년 11월 한국 독립당신한 독립당조선 혁명당의열단 등의 대표가 상해에 모여 독립 운동 단체의 연합체로 한국 대일 전선 통일 동맹을 조직했다. 1935년 7월에는 조직을 강화하고자 각 정당들이 자진 해체하고, 단일 정당으로 조선 민족 혁명당을 발족했다. 여기에 임시 정부의 국무 위원이던 양기탁유동열김규식조소앙최동오 등도 입당했으나 김구를 비롯한 임정 고수파는 참여를 거부했다.
조선 민족 혁명당은 정강 정책으로 지방 자치제,남녀 평등, 토지의 국유화와 농민에게 분배, 대규모 생산 기업 및 독점 기업의 국유화, 통제 경제, 의무 교육 등을 내세워 사회 민주주의적 색채를 띄었다. 기관지 우리들의 생활과 대외용 기관지 민족 혁명발간했으며, 청년들을 중국 군사 학교에 입학시켜 독립군을 양성했다. 조선 민족 혁명당의 우익 계열인 한국 독립당계와 조선 혁명당계가 이탈한 뒤, 1937년 11월 조선 민족 해방 운동자 동맹조선 청년 전위 동맹조선 혁명자 연맹을 비롯한 좌익 계열과 연합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했다. 군관 학교 졸업생들로 중국내 최초의 조선인 군부대인 조선 의용대를 창설하고 김원봉을 총대장으로 삼아 활발한 활동을 했다.
11. 일장기 말소 사건
1936년 나치 독일은 이른바 게르만 민족의 위대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역사상 최대 규모의 올림픽을 열었다. 일본 선수단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손기정 선수가 8월 10일 세계 기록을 세우며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국내 언론들은 이를 대서 특필했다. 8월 13일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에 실었으나 총독부의 검열에 발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8월 24일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말소한 손기정의 사진을 게재한 것이 결국 검열에 발각되었다.
<조선중앙일보>는 끝내 폐간되었고,<동아일보>는 297일 동안 정간을 당하고 사건에 관계한 기자를 비롯한 13명이 사직당한 뒤 복간되었다. 1937년 6월 다시 발행된 <동아일보>는 “당국의 발행 정지 해제라는 관대한 처분을 받았으니 앞으로는 대일본 제국의 언론 기관으로 조선 통치에 적극 협조 하겠다”는 내용의 사고를 발표했다. 이후 한때 민족지를 자체했던 <동아일보>는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친일 언론이 되었다.
12. 맺은말
모든 역사는 투쟁과 혁명으로 이루어져있다. 그것은 절대 나쁘고 이상한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 거쳐 가야 할 필수적인 관문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1930년대의 항일 무장 투쟁 운동에서도 그렇듯 투쟁과 혁명은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선조들의 뜨거운 노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를 의미 있게 살아가고 후세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서대숙 저, 현대 북한의 지도자, 을유출판사
하일식 저, 현표와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 일빛
누드교과서SE, 한국 근현대사, ETOOS.
이야기 한국역사12, 풀빛.
바로보는 우리역사, 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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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4.06.19
  • 저작시기2014.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24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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