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운동 (국내 비밀단체들의 활동, 해외 독립군부대의 탄생, 항일무장투쟁운동, 독립군의 시련과 재정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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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민족운동사]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운동 (국내 비밀단체들의 활동, 해외 독립군부대의 탄생, 항일무장투쟁운동, 독립군의 시련과 재정비 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1920년대의 시대상황

3. 국내 비밀단체들의 활동

4. 해외 독립군부대의 탄생

5.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운동

6. 독립군의 시련

7. 독립군의 재정비

8. 맺은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문서
미쓰야 협정은 만주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일제가 만주 군벌이던 장 쭤린에게 지원을 약속한 대신 한국 독립군의 탄압을 요구한 협정이다. 이 협정의 체결로 만주에서의 한국 독립군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독립군은 다시 한번 뼈를 깎는‘구조 조정’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선용. 이기항. 윤원혜 , 『누드교과서 SE』, ETOOS , 2006 , 177~191쪽.
7. 독립군의 재정비
자유시 사변을 계기로 만주에 있던 독립군의 주력 부대가 속한 대한의용군도 러시아군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독립군은 큰 타격을 입었으나 이와 같은 역경은 독립군 지도자를 크게 각성시켜, 이전의 분산적이고 개별적인 활동으로는 효과적인 항일전을 벌일 수 없음을 깨닫게 했다.
그리하여 독립군은 1925년까지 모두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세 단체로 통합되었다.
참의부는 압록강 연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압록강 유역과 접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국경을 넘어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는 등 활발한 대일 항쟁을 벌였다. 독립군들은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정의부는 유하현 삼원보에 본부를 두었고, 이후 화전길림의 신안둔반석 등으로 본부를 옮기면서, 하얼빈 이남의 모든 남만주 지역을 관할했다.
신민부는 북만주 영안현을 비롯하여 주하목릉밀산요하돈하현 등을 관할 지역으로 했다.
이렇게 3부는 각기 그들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관할 지역을 정했다. 그리고 간도 참변 이후 강화된 일제의 독립군 탄압을 막아내며 무력으로 맞싸웠을 뿐만 아니라, 한인의 자치를 담당하는 군 정부로서의 역할을 했다. 세 단체는 각기 스스로의 힘을 키워 나가는 한편, 보다 강력한 항일 투쟁을 벌이기 위해 하나의 독립 운동 단체로 뭉치려 했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무렵 만주에는 수많은 일본 첩자들이 마구 설치고 다녀서 일은 더욱 어려웠다.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나라 없는 설움과 어려움을 이겨 내면서 항일 투쟁을 훌륭히 수행했다. 한인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에도 독립 운동 단체가 조직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들 독립 단체는 민주적인 운영으로 조선인의 경제 생활은 물론, 교육과 문화 사업 등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사관학교와 훈련소를 세워 독립군을 기르고, 각지로부터 군자금을 모아 무기를 사들였으며, 독립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1925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와 장작림의 부화 우진 사이에 미쓰야 협정이 맺어져, 독립군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28년12월 하순, 길림에서 신민부와 참의부 그리고 정의부에서 나온 사람들이 모여 ‘혁신의회’ 를 조직했다. 또한 1929년 4월 1일, 길림 지방에서는 정의부가 신민부 군정파와 참의부의 심용준파와 함께 ‘국민부’를 조직했다. 이로써 독립 운동 단체는 다시 대동 통합이라는 민족적 요구에 의하여 혁신의회와 국민부로 다시 편성되었다.
남만주 지역을 관활했던 국민부는 1929년 9월에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조선혁명군을 편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만주 지역을 관활했던 혁신의회는 1930년,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군사 조직인 한국독립군을 편성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하자,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은 각각 중국측 만주의 무장 부대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1930년대 중반까지 활발한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중국 공산군과 연합 작전을 벌인 한국독립군은 1933년에 쌍성보사도하자동경성대전자령에서 일만 연합군을 대파했으며, 조선혁명군은 중국의 요령 민중 자위군과 연합 작전을 펼쳐 영능가신빈현흥경통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눈부신 활약을 했다.
임시정부 중심으로는 1920년대 중반 이후 통일적인 민족 운동을 벌일 수 없게 되자, 독립 운동가들은 그 타결책으로 통일전선 운동을 전개했다. 중국 안에서는 민족 유일당을 건립하고자 하는 운동과 만주의 독립 운동 단체인 3부를 통합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신간회 결성 운동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민족 유일당 운동은 이제까지 흩어져 있던 여러 단체들을 한데 끌어모아 통일적인 결합을 이루어 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지엽적이고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운동을 뛰어 넘어 전 민족적인 독립 투쟁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따라서 민족 유일당 운동을 1920년대 후반기에 민족의 힘을 한데 모으고자 하는 새로운 독립 운동의 방법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유일당 운동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유일당의 성격이나 목적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드러냄으로써 분열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세력은 자신들이 유일당의 주도권을 잡고 이를 혁명 정당으로 발전시킬 것을 원했다. 반면, 민족주의 세력은 전선의 통일과 정부 조직보다는 당으로써 나라를 다스리자며 임시정부의 위상을 강화시키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
이 같은 두 세력간의 입장 차이로 말미암아 결국 유일당의 통일적 지도 노선을 세울 수가 없었다. 바로 이 점이 이 시기 민족 협동 전선 운동이 실패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1929년 10월‘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결성했고, 민족주의 계열은 1930년1월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이야기 한국역사 편집위원회 , 『이야기 한국역사 11 』, 풀빛 , 1997 , 177~191쪽.
8. 맺은말
여기까지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운동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식민지시대에 우리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바쳐 싸웠던 선조들의 용기와 애국심에 대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살기 좋은 세상이 왔지만 어렵고 힘든 식민지시대 보다 나라를 위하는 애국심이 더 없는것 같다 이러한 점에 반성을 하고 어려웠던 일제시대들의 선조들의 정신을 본받아 나라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대진인이 됩시다!!!
참고자료
이야기 한국역사 (일제 식민통치와 항일투쟁) - 이야기 한국역사 편집위원회
식민지 시대 한국의 사회와 저항 - 강재언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 역사학연구소
한국근대민중운동사 - 망원한국사연구실
식민지시대 민족해방운동 - 윤대원
한국사(근대)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바로보기 - 유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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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9
  • 저작시기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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