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1920년대의 항일전쟁 - 봉오동승첩, 삼둔자전투, 봉오동대첩, 청산리전투, 백운평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곡전투, 인물조사(김좌진, 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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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민족운동사] 1920년대의 항일전쟁 - 봉오동승첩, 삼둔자전투, 봉오동대첩, 청산리전투, 백운평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곡전투, 인물조사(김좌진, 홍범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봉오동승첩
(1) 삼둔자전투
(2) 봉오동대첩
(3) 봉오동대첩의 영향

2. 청산리전투
(1) 백운평 전투
(2) 어랑촌 전투
(3) 고동하곡 전투
(4) 청산리 대첩의 의의

3. 인물조사
(1) 김좌진
(2) 홍범도

4.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으니, 전후 연달은 전쟁에서 왜적을 토벌하여 그 성명이 온 나라를 진동하게 하였다."
이 말은 의암 유인석이 홍범도 의병장의 연전연승을 칭송하는 글 속에 한 구절이다.
홍범도는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어난 처절한 의병항전에서 살아남은 의병을 수습, 일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록에 자리잡은 장백현왕개둔에 들어가 둔전병영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우수리강 동쪽 광활한 강동 연해주 지방으로 근거지를 옮기며 장기 항전의 새 터전을 잡아갔다. 그곳에서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서북간도를 드나들며 항전을 벌이기도 하다가 1919년 3 1운동 무렵에는 연해주 안의 고려사람이 되어 독립군이 재기항전할 준비를 서둘렀다.
한두 가지 그 행적을 들면 첫째, 망국직전인 1910년 6월에는 고려사람이 연추라고 부르던 크라스키노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등을 중심으로 국외 의병의 최후 구국항일전을 기도한 13도 의군 편성에 가담하였다. 둘째, 홍범도는 러시아 관헌의 탄압 속에서도 휘하에 항일의병과 한인청년을 모아 신한촌에 본부를 둔 노동회를 조직, 시베리아철도공사 등 각종 개발 공사 현장으로 보내 임금의 일정액을 정기 저축하여 군자금을 조성하였다. 셋째, 그가 지휘한 1920년 6월 봉오동승첩과 김좌진과 연합작적을 편 그해10월 청산리대첩의 전사는 한국독립군사의 가장 광망을 보인 대목이다. 봉오동 승첩은 3 1운동 발발 후 국내 진공작적을 되풀이한 봉오동의 독립군근거지를 일거에 소탕하려고 기도한 일제가 ‘월강추격대대’란 특별정예전단을 편성하여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 본영인 봉오동을 공격해 오는 것을 맞아 용전을 벌여 그들을 완전 괴멸시킨 전사이다.
이때 홍범도는 탁월한 작전과 지휘로 몇 배가 넘는 일제 ‘토벌군’을 여지없이 무찔러 독립군의 드높은 기상을 내외에 드날렸다.
이후 자유시참변은 겪은 홍범도는 이르크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한인부대로 이송되었으나 아무런 군권도 행사하지 못하는 노장으로 민족해방유격대의 원로 예우만 받게 되었다. 그후 카자린 지역에서 농사를 짓다가 1927년에는 공산당에 입당하고 한인이 많이 사는 힝카호지역 농장에서 일하였다. 이 무렵 홍범도는 틈만나면 남쪽 수청으로부터 북쪽 아무르강 입구의 니콜라예프스크에 있는 밋갈레라는 고려인 마을에 이르기까지 곳곳을 찾아다니며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시베리아 고려인의 숭앙을 받았다.
1937년에 스탈린의 극동한인의 강제추방 때 69세의 고령으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라는 황량한 오지까지 가게되었다. 그가 말년에 살다 간 크즐오르다시 스랩나냐 거리의 옛집은 시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어 개수, 단장되었으며 그 앞의 거리는 ‘홍범도거리’로 명명되어 그 유래를 적은 안내판도 부착해 놓았다. 75세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한 그의 유택은 크즐오르다시 공동묘지 중앙광장에 마련, 홍범도의 흉상까지 조성해 한길 석대 위해 안치해 놓았다. 의병의 명장, 독립군의 용장, 그리고 러시아 고려사람의 영도자로 길이 역사에 전승될 위인으로 대한민국 정부에서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신재홍, 앞에 책, 197~202쪽
4. 결론
1919년 31 운동이라는 평화적이고, 커다란 민족적 시위가 일어났다. 이는 땅의 본래 주인이었던 우리가 그 것을 되돌려 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거족적인 평화시위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우리의 땅, 즉 주권을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우리민족은 더 이상 평화적인 시위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 내렸다. 그리하여 1920년대, 우리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항일 무장 투쟁이 시작되었다. 1920년대는 일제의 소위 문화통치라 불리리우는 사탕발림식의 시기였다. 보통경찰 시대가 되어 사회 분위기가 부드러워졌으나, 오히려 경찰의 수는 10년대보다 늘었고, 민족지 창간을 허용해주기는 했으나, 검열과 삭제가 있었으며, 독립운동을 국내에서 허용한 것은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쉽게 얻고자 한 측면 때문이었다. 이 문화통치라 하는 것은 빛 좋은 개살구 에 불과했다. 사실 일제는 우리민족을 기만한 것 이었다. 이러한 통치에 독립 운동가들은 국내에서는 독립투쟁을 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고, 해외(간도,만주,연해주 등)지역으로 하나둘씩 떠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우리의 민족 운동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함으로써 항일 독립 운동은 본격화되었다. 그 시발점이기도 한, 독립전쟁의 전투중 가장 빛나는 전투가 봉오동대첩(1920.6.7)과 청산리대첩(1920.10.21-10.26)이었다. 이 전투는 우리민족이 일본군을 상대로 최초로 맛본 승리였다. 이로써 일제치하의 시간동안 한번도 강력한 대응을 해보지 못한 우리 민족에게는 맺힌 한을 풀어주었고 독립운동가들 에게는 사기를 충전하며 독립의지를 불태워주게 했던 사건이었다. 그 밖에도 우리민족은 많은 항일투쟁들을 하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과시하였고 마침내 우리민족은 투쟁에 목숨을 바친 고결한 인물들의 힘과 민중들의 애국심으로 1945년 8월 15일, 독립이라는 꿈을 실현시켰다. 항일 무장 투쟁은 제국주의지배에 맞서서 민족자존의 유구한 전통과 민족 동질성을 되살리고 수호하려는 대열에 최선봉에 섬으로써, 민족정기의 보전 및 재확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중요 인자가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355p
우리는 항일무장 투쟁을 조사하면서, 역사는 결코, 이름이 알려진 영웅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조상들과 그 시대에 살면서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려고 노력했던 수많은 민중들, 그리고 우리에게 친숙한 이웃들이 만들어가는 것 이라는 사실을 새삼느낄 수 있었다.
참고문헌
신용하, 「한국항일독립운동사연구」, 경인문화사, 2006
하일식,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 일빛, 199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48-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탐구당, 2001
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근현대사」, 서해문집, 2007
신재홍, 「광복의 역사인물한국역사연구회」, 연합뉴스, 1999
한국역사위원회,「한국역사입문③」,풀빛, 1996
역사문제연구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 웅진출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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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9
  • 저작시기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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