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일제하 조선의 노동운동 - 1910년대 노동운동, 일제의 경제정책과 노동자 존재 형태 및 노동운동의 전개와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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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민족운동사] 일제하 조선의 노동운동 - 1910년대 노동운동, 일제의 경제정책과 노동자 존재 형태 및 노동운동의 전개와 3·1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일제의 경제정책과 노동자 존재 형태
(1) 산업구조와 공업의 특징
(2) 노동자계급의 형성
(3) 노동자 존재 형태

2. 노동운동의 전개와 3·1운동
(1) 3·1운동 이전 노동운동
(2) 민중의 투쟁 3·1운동

참고문헌

본문내용

조사되었으며, 그 가운데 시위 14건, 파업 10건이었다. 또 시위 가운데 노동자 독자적으로 시위를 벌인 경우는 10건, 4건은 학생 등과 연대하여 전개 되었다.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 규모가 가장 컸던 것은 3월 27일 만철경성관리국 노동자 800명이 전개한 시위였으며, 다음으로는 경성 동아 연초공장의 유년 노동자 등 500여 명이 참가한 것이었다. 시위는 폭력적인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3월 28일 200여 명의 직산광산 노동자가 전개한 시위는 전화선 절단, 헌병주재소 습격으로 이어졌으며, 일본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 6명이 발생하고 8명이 체포되었다. 지역별로는 노동자 밀집지역이라 할 수 있는 경성, 평안도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경성에서는 3월 2일 노동자 시위가 전개 된 이후 노동자 결근율이 90%에 이를 정도였다. 3 1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노동자층이 라 할지라도 출근 기피 등의 방법으로 일제에 저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1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한 파업 가운데에는 그 기간이 20여일을 지속할 정도의 지구전을 편 파업이 발생하기도 했다. 3월 9일 경성전기회사에서 발생한 파업은 3월 29까지 계속되었고, 경성시내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파업이 발생하자 일제는 조선노동자에 대해 회유와 협박으로 전차운행을 강행케 하였으나, 이것이 오히려 노동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3월10일에는 300여 명의 노동자가 종로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다. 그 후에도 노동자들은 투석 등을 통해 전차운행을 방해했다. 이 시기 노동자층의 3 1 운동 참여는 업종을 넘어 전개 되었다. 곧 공장노동자, 토목공사장 노동자, 부두노동자는 물론이거니와 광산노동자 또한 파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특히 광산노동자의 파업은 광구 파괴와 광석 등 폭력적 양상을 띠었다.
다음으로 3 1 운동이 발생하여 노동운동이 고양되었던 1919년도 전체 노동자 파업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3 1 운동으로 고양되기 시작한 노동자 파업은 1919년 내내 지속되었으나, 특히 3 1 운동이 소강상태에 있던 7~1-0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전개 되었다. 즉 월별 파업추이를 살펴보면, 3 1 운동 직전인 1~2월 사이 전체 84건 가운데 11건이 발생하여 13.2%를 차지했으며, 3~6월 사이에도 12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7~8월 사이에 36건으로 43.4%를 차지하여 파업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9~12월 사이에는 24건이 발생했다.
둘째, 지역별로는 공장 공업이 발전하고 있던 경기도 경상남도 평안남도에서 전체 파업의 75%를 차지했다.
셋째, 파업의 주요 원인은 앞선 시기와 마찬가지로 임금 문제가 약 90%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임금문제 가운데 특히 임금인상 요구가 70건으로 약 83%를 차지했다. 주요한 원인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물가 상승과 실질임금의 저하, 일본 노동자의 절반에 못 미치는 민족 차별적 임금 때문이었다. 또한 노동자 측에 불리한 임금지급 방법을 개선하려는 요구는 고정적인 급료 지급일자의 확정, 월급제 시행, 성과급과 일급제 사이의 불균형 해소 등이 그 원인이었으며 5건으로 약 6%를 차지했다.
넷째, 파업 참가 규모가 1910년대 그 어느 시기보다 증가했다. 또한 전체 84건의 파업 중 100명 이상 참가한 경우는 25건으로 약 30%, 200명 이상은 14건으로 약17%를 차지했다. 즉 100명 이상이 참가한 파업이 전체의 1/3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화했다.
다섯째, 파업기간은 전체적으로 254일에 이르러 1년 중 파업이 없던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연일 파업이 계속되었으며, 평균적으로 파업 기간은 약 3일이었다. 그러나 1주 이상을 지속한 파업도 11건이나 되었다. 파업기간이 가장 길었던 경우는 경성의 1919년 10월 12일 발생한 동아연초회사의 경우로 17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며, 수당 100%인상에 합의하고 파업에서 승리했다.
여섯째, 1919년 파업 참가자의 직종별 분포상황과 인원을 살펴보면, 업종별 파업건수는 인쇄노동자, 제화 및 피혁노동자, 정미소 노동자, 담배공장노동자 순이다. 그러나 파업참가 인원은 제화 및 피혁노동자, 담배공장노동자, 정미소노동자, 인쇄노동자순이다. 그 가운데 정미소 부두노동자의 파업은 당시 일제의 수탈 농정의 주요 목표가 토지 약탈과 조선산 쌀의 일본 노동시장 공급에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수탈정책에 일정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문제였다. 즉 부산 인천 목포 군산 등 주요 도시에는 일본으로 이출하기 위해 벼를 도정하는 일본인소유의 정미소가 21개소, 노동자 수도 또한 상당수 존재했다. 이들 노동자들은 대부분 일제의‘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농촌에서 유출된 농촌빈민 출신들로 이미 일차적인 수탈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따라서 이들 노동자 파업이 1910년대에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상에 살펴본 것처럼 조선노동자는 3 1 운동 발생 이후 파업을 주도하면서 투쟁경험을 축적하였으며, 이러한 경험은 1920년대 노동자 조직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온 하나의 요인이었다. 1910년대 조선노동자층은 민족해방운동의 주체 세력으로서 비록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3 1 운동과 그로 인한 노동운동의 고양의 계기가 되어 점차 파업을 조직하고, 노동자조직을 만들어 가는 등 성장해가고 있었다. 즉 3 1 운동을 계기로 노동자층은 조직역량을 발전시키고 있었고, 1920년대에는 전국적은 노동자조직으로 결집되어 조선노동공제회와 직업별 노조를 만드는 기반이 되었으며,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강길만, 앞의책, 224~243쪽
참고문헌
김영곤, 『한국 노동사와 미래』, 선인, 2005
강길만, 『한국노동운동사Ⅰ』, 지식마당, 2004
김경일, 『한국노동운동사Ⅱ』, 지식마당, 2004
김경일, 『일제하 노동운동사』, 창작과 비평사, 1992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05
최윤규, 『근현대 조선경제사』, 갈무지, 1988
김윤환, 『한국노동운동사1-일제하편』, 청사, 1982
김윤환, 『한국노동운동사 1』, 청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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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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