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실력양성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 시대상황과 민립대학 설립운동 전개 및 실패 이유,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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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운동사] (실력양성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 시대상황과 민립대학 설립운동 전개 및 실패 이유,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의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시대 상황
 (1) 사회운동의 미분화와 좌우대립의 초기 성격
 (2) 사립교육

3. 민립대학 설립운동 전개

4. 민족교육운동론
 (1) 민족주의 우파의 지식인 양성론
 (2) 민족주의 좌파의 전민족적 교육진흥론
 (3) 사회주의 계열의 무산대중본위 교육론

5. 실패 이유

6.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의의

7.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육운동의 논리와 전개」,연세대 교육대학원, 2001, 46~49쪽.
1925년에 문화운동 및 문예운동으로까지 표현되었던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성공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는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전민족적으로 전개되어야 함으로 비밀리에 전개될 수 없었고 공개적으로 전개될 때 일제 통치에 위협을 가하는 성격을 띠고서는 절대로 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일제의 통치 테두리 안에서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를 스스로 안고 시작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 운동이 단순히 교육운동이라기 보다는 정치운동, 민족운동이 대학설립이라고 하는 교육운동의 형태로 표현된 것이라고 총독부가 인식하면서 처음에는 ‘매우 좋은 일이니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한국인 관리와 군수, 도의원들에게까지 권고하던 입장을 바꿔 그것을 허용하지 않고 기성회의 기금모금활동을 여러 가지로 제약하게 된 것도 실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지도자와 간부들의 실천력 부족을 들 수 있다. 민립대학 기성회 중앙상무위원이었던 강인택은 동아일보 기자의 질문에 대해 민립대학의 실패원인이 간부된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터럭 끝만치라도 권리가 있다면 벌써 실현되었을 것입니다. 기간 각지방에서 활동도 좀 하여 보았지만 천가지 만가지 저해받은 일도 실로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간부된 사람들의 잘못입니다. 앞으로 더욱 힘을 써 일하렵니다.
라고 답하고 있다. 또한 『동아일보』1923년 7월 8일자 사설 ‘민대기성운동의 발전’에서도 지금까지의 운동은 취지선정과 기관설립에 그쳤을 뿐 특지의 의거와 실지의 역조는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모금에 있어 실질적 실천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이 운동의 주체와 운동의 추진과정에 대한 불신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민립대학 기성회는 학교가 설립된 상태도 아니며 무슨 종교단체나 언론기관도 아니고 학교가 설립된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립학교 재단의 것이 될지 알 수 없었으므로 선뜻 헌금하기가 불안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실패된 뒤에 과연 모금액이 얼마였는지 그 뒷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실한 자료가 없다.
네 번째는 한국민족 1천만이 1원씩만 회사하면 쉽게 될 수 있다는 기성회 인사들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즉, 당시 일제의 식민지 경제 수탈정책과 가혹한 소작제도하에서 민중은 경제적 파멸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벽』지에도 ‘이렇게 정치적경제적으로 일복일 파멸을 가하는 이 판국에서 민대가 과연 성립이 될까, 민대문제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없을까’라고 하면서 날로 경제적 파멸에 직면한 상황에서 대학설립의 거금이 모금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더군다나 1923년 전국에 대홍수가 일어나고, 1924년에는 남부지방에 극심한 가뭄이 발생하고 또 1925년에 대홍수가 일어나면서 모금상태는 더욱 저조하게 된 것이다.
6.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의의 오영미,「1920년대 한국민족교육운동의 논리와 전개」,연세대 교육대학원, 2001, 49쪽.
결국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실패하였지만 민족의 발전을 기약하고 실력양성을 위해서는 대학교육이 필요하며 해외유학으로 인한 손실을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일어난 일제 식민지 시대를 통해 가장 큰 민족교육운동이었으며 식민지 초기에 구체화되지 못한 산발적인 민중운동에 조직적인 단체결성의 한 예가 되었다는데 큰 의의가 이다. 또한 일제의 교육정책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여 비록 우리가 세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가 최초로 대학을 갖게 되었다는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7. 맺음말 오영미,「1920년대 한국민족교육운동의 논리와 전개」,연세대 교육대학원, 2001, 58~60쪽.
1920년대의 민족교육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는데 민족주의 좌우파와 사회주의 계열이 각각 다른 사상을 가지고 교육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게 되었다.
민족주의 우파 계열은 ‘선실력양성 후독립론’을 내용으로 하면서 교육의 진흥, 산업의 개발을 주요 목표로 문화와 경제적인 향상에 의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민족의 약량을 길러 일제에 대항하자는 실력양성론은 바탕으로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식민지 지식인 엘리트만을 위한 것으로 일반 대중을 소홀히 생각한 것이었다.
민족주의 좌파 계열은 처음에는 민족주의 우파와 마찬가지로 전국민을 계몽하기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민족적 주체위식에 입각한 실력양성론의 입장을 고수하여 항일 정신을 함양하고 민족의 일체의식을 불러일으키는데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어 모든 국민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하였고 식민지 교육이 한국 민족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교육이라고 인식하였다.
사회주의 계열은 1920년대 초기부터 각종 청년단체나 농민단체, 노동자단체 등은 조직하여 계급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였는데 이들은 교육에 있어서 민족주의 우파의 조선인본위 교육운동을 비판하고 교육이 민중에게 계급의식을 주입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제도적 교육보다는 강습소야학을 통한 민중교육에 더욱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통해서 가장 큰 규모로 전개된 민족교육운동으로 대학 교육을 통해서 지도적 인재를 길러내고 전국적인 조직체를 형성하여 민족단결을 도모하여 일제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비록 이 운동이 일제의 탄압과 지도자와 간부들의 실천력 부족, 이 운동의 주체와 운동의 추진과정에 대한 불신, 민중들의 경제적 빈곤 등으로 인해서 실패하였으나 일제의 차별적인 교육정책에 자극을 주어 우리나라에 최초의 대학이 설립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서중석,『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1992
국사편찬위원회 편집부,『한국사 51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국사편찬위원회, 2001
오영미,「1920년대 한국민족교육운동의 논리와 전개」,연세대 교육대학원, 2001
장세윤,「일제의 경성제국대학 설립과 운영」,『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 6집』,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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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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