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 - 민립대학설립운동의 배경과 전개 및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의의와 한계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한국민족운동사]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 - 민립대학설립운동의 배경과 전개 및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의의와 한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민립대학설립운동의 배경
 (1) 민립대학설립운동의 배경
 (2) 조선교육회와 조선교육개선기성회

3.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전개
 (1) 조선민립대학기성회
 (2)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전개
 (3) 민립대학설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
 (4) 민립대학설립운동의 결과

4.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의의와 한계

참고문헌

본문내용

군데 이상된 지부에 대한 연락이나 지도하는 일조차도 힘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민립대학기성회 중앙상무위원은 동아일보 기자의 질문에 대해 실패원인 중의 하나는 간부된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답변하고 있다. (동아일보 1925년 9월 1일자), 동아일보 1923년 7월 28일자 기사에서도 지금까지의 운동은 취지선전과 기관설립에 그쳤을 뿐이라면서 모금에 실질적 실천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두 번째, 이 운동의 주체와 운동의 추진과정에 대한 불신이다.
과거의 경험도 그렇거니와 당시 우리 국가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기금 부조리에 대해 감독책임을 할 기관이 없었으니 누구를 믿고 돈을 내겠는가 하는 것이다. 차라리 어떤 언론기관이거나 기존 학교라면 어느 정도 신임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민립대학기성회는 학교가 설립된 상태도 아니며 무슨 종교단체나 언론기관도 아니고 어떻게 될 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인데, 또 학교가 설립된다 해도 어떤 사립학교재단의 것이 될 지 어떤 소수 인사들의 재단이 될 지 알 수 없는 기성회에 선뜻 헌금하기는 불안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민립대학기성회에서도 지방인사들이 중앙에 송금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실패된 뒤에 과연 모금액이 얼마였는지 그 뒤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실한 자료가 없다. 동아일보 1926년 3월 6일자에는 모금액이 문서상으로 수 백만원이라고 하였고, 기성회의 간부였던 이인도 그 회고담에서 기금처리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가 없다.
셋째, 한국인의 경제적 빈곤이었다.
당시 일제의 가혹한 수탈정책으로 한국 민중은 경제적 파멸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도교의 《개벽》은 “이렇게 정치적, 경제적으로 일제가 압력을 가하는 판국에서 민대가 과연 성립이 될까 민대문제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없을까”라고 하면서 날로 경제적 파멸에 직면한 상황에서 대학설립의 기금이 모금될 수 있을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말하자면 극빈한 민중들의 측변에서 볼 때 이러한 민족주의자들의 요구는 민중의 가슴에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민중은 경제적 파멸로 유랑민이 되거나 만주 등지로의 이민이나 화전민이 되는 사례가 급증하여 보통학교조차 취학시키지 못하는 처지에서 대학설립기금에 응할 수 없었고 다만 부호들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들도 불신심리와 일제의 압력에 의시한 입장에서 기부금헌금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밖에도 일제의 탄압, 천재지변, 민족의식의 부족 등을 실패원인으로 보고 있으나 사실 이것들은 실패의 큰 원인이 아니었으며 그 영향력은 미비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 원인은 당시 한국사회의 역사적 상황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1운동 후 192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성격은 크게 전환되었으며 사회구조의 변화와 함께 민중의식의 성장으로 사회운동이 전개되었다. 3 1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등장된 민중의 자각과 의식은 크게 고조되었으며, 일제 식민지배로 인한 구조적 모순 때문에 경제적 파멸에 직면한 농민을 비롯한 민중은 생사를 위한 경제적 투쟁과 신분적 해방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920년대 전반기에는 농민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청년운동, 소년운동, 형평운동 등 계층별 해방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특히 민중들은 경제적 빈곤으로부터의 해방과 지적무지로부터 해방을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하였고 조직적 운동으로 욕구를 분출시켰다. 이 결과 소작쟁의, 노동쟁의 등을 전개시켰고 개량서당과 야학강습소의 설립 등 교육열을 스스로의 자력으로 충족시키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전개되는 1923년과 1924년은 더욱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한 계층에게는 불리한 해였다. 이 시기에는 농민단체, 노동단체, 청년단체의 조직이 확대 강화되고 이미 사회주의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며 민족주의 운동의 입지가 위축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더욱이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주체들이 같은 시기에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이들 주체의 힘의 분산은 물론 이들 부르주아적 민족주의 운동은 성공되기 힘든 시기였다.
결국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은 모두 동시에 시작하여 함게 실패하였거니와 당시 민중들에게는 이와같은 과제보다는 생존권 문제와 문맹퇴치등 민중계몽교육이 더 중요한 당면과제였고 사회주의자는 이들 중산층의 운동에 반대하고 있었다. 결국 실천력 부족과 불신, 민중들의 현실을 생각하지 못한채 전개된 민립대학설립운동은 한계를 드러내며 실패했던 것이다. 盧榮澤, 「民立大學設立運動 硏究」,『국사관논총 제11호』, 국사편찬위원회, 1990년. 88쪽~94쪽
5. 맺음말
민립대학설립에 대한 주장은 운동으로써 전국적 규모로 전개된 것은 1923년부터이지만 그 이전에 사립대학설립에 대한 관립대학설립에 대한 주장은 있어왔다. 한국에서 대학설립에 대한 구체적 논의와 추진이 본격화되기는 3.1운동 뒤의 일이다. 총독부의 1922년 4월 개정된 교육령을 공포함으로 인해 대학설립의 법적근거가 마련되었다. 1922년 11월 민립대학기성준비회가 개최됨으로 민립대학설립운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전국 백여 곳의 부군에 지방부가 설치될 정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나 1년도 채 안되어 열기가 식어지고 용두사미처럼 되어 실패로 끝나게 된다. 실패원인으로는 이운동의 지도자와 간부들의 희생적인 활동부족과 열성부족, 추진세력과 운영체제에 대한 민중의 불신, 한국인의 경제적 빈곤이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중산층 주도의 민족운동의 지지기반이 미약하였거나 상실되었기 때문에 실패하게 된 점이다. 대중들의 현실과 괴리되어 있었던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은 결국 대중들의 외면을 받으며 실패하고 만 것이다.
참고문헌
김호일, 『한국근현대이행기민족운동』, 도서출판 신서원, 2000
로영택, 「민립대학설립운동 연구」,『국사관논총 제11호』, 국사편찬위원회, 1990
김삼웅, 『사료로 보는 20세기 한국사』, 가람기획, 1997
김동명, 『지배와 저항 그리고 협력』, 경인문화사, 2006
대학사연구회, 『전환의 시대 대학은 무엇인가』, 2000
  • 가격2,300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14.06.19
  • 저작시기2014.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2510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