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 - 금주단연운동, 물산장려운동의 시대적 배경, 조선물산 장려회의 설립과정과 활동 및 인물소개, 물산장려 논쟁, 물산장려운동의 의의와 실패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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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민족운동사]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 - 금주단연운동, 물산장려운동의 시대적 배경, 조선물산 장려회의 설립과정과 활동 및 인물소개, 물산장려 논쟁, 물산장려운동의 의의와 실패원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금주단연운동
3. 물산장려운동의 시대적 배경
4. 조선물산 장려회의 설립과정과 활동
5. 조선물산 장려회의 인물소개 및 두가지 논리
6.사회주의사상 수용과 물산장려 논쟁
7. 물산장려운동의 의의, 실패원인
8.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는 민족운동을 이끌어갈 뚜렷한 구심점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먼저 나타난 물산장려운동은 민족주의진영의 구심점 형성에 일정하게 자극을 줄 수 있었다.
즉 물산장려운동은 3.1운동이후 국내 민족운동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물산장려운동은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가장 광범위한 지역과 계층을 망라하여 조직화시킨 최초의 민족운동이었다. 물론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기 전에 몇몇 사회 민족 운동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 운동만큼 거족적인 호응을 받은 운동은 없었다.
둘째, 일제하의 국내 민족운동사상 물산장려운동만큼 오랫동안 지속된 운동은 없다는 의미에서 이 운동은 민족운동사상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운동은 약 20여년간(1920-40) 계속 진행되었다. 비록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기간은 그렇게 장기적이지 못
하였지만, 일제의 직접적 통치를 받고 있는 국내상황을 감안할 때, 우리 것을 강조하는 이 운동이 존속한 것 자체가 민족운동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산장려운동은 식민통치를 직접 겪고 있던 백성들이 일종의 생존권 투쟁을 통해 민족문제를 제기한 사건으로 해외 등지에서 정치 외교 군사적 방법으로 민족문제 해결에 접근한 것과는 출발이 달랐다. 생존자체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때로는 국권회복이라는 민족적 이상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세계사적 명제를 인식하지 못한 때도 있었다. 따라서 물산장려운동에서는 강건한 투쟁의지나 용감함 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때로는 '운동'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적막'했고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이 운동의 이면에는 끈기와 인내가 숨어있었으며, 이는 구차하게라도 생존하는 것 자체가 민족사적 의미를 갖는 식민지의 백성처럼, 국내 민족운동의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띄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장기간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운동이 취했던 운동방법론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제의 극심한 무단통치는 한반도를 감옥으로 만들어서 그 안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감옥살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족운동이란 진정 어떤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역사이해에서 상황을 강조하거나 인간의 한계를 너무 의식하면 원칙이 훼손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기약점과 상황과의 관계는 역사이해와 평가에서 늘 동시에 고려해야 할 변수이다.
결과적으로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실패 이유에 대해선 몇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자본과 기술의 부족으로 인한 일본자본과의 경쟁력 부족이다. 이는 식민지 조선의 민족자본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한계로써, ‘토산장려’만으로는 ‘자본과 기술의 부족’이라는 문제까지 해결 할 수는 없었다. 취약한 민족자본이 충분한 자본주의적 생산을 통해 소비운동을 뒷받침 하지 못할 때 이미 자본제적 상품을 소비하지 않고서는 생활할 수 없었던 조선의 민중들은 더 이상 토산물 소비운동을 지속할 수 가 없었다.
둘째, 운동의 조직력이 취약했다는 점이다. 서울의 물산장려회는 서울만의 조직이었을 뿐 지방의 물산장려운동 단체들과는 거의 조직적 연결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각 지방에서의 운동은 모두 개별 분산적인 형태로 일어났다가 가라 앉아 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1923년 초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물산장려운동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산장려운동은 조직력에서 극히 취약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이밖에 일제 관헌의 방해, 상인들의 농간에 의한 물가의 폭등 등의 요인이 있지만 이는 부수적인 요인에 해당한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이 한계를 드러낸 채 사실상 막을 내리자 조선의 민족부르주아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하나는 자력갱생의 길을 계속 모색하면서 자기 존립을 꾀해 나아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총독부권력에 보호를 구걸하는 길이었다. 민족자본가 가운데 대자본에 속하는 부류는 후자의 길을 택한다. 민족자본가들 가운데 최상층에 속하는 이들은 그들이 갖고 있던 타협성을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도 일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8. 맺음말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물산장려 운동에 대해 배웠던 것을 알아보면 물산장려운동은 민족계몽운동의 일환으로써 일제의 탄압에 붕괴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이것은 한편으론 물산장려운동이 우리에게 민족주의적인 운동으로 사라져간 수많은 운동중에 하나로 기억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현시대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그 시대에도 일으킨 한편으로는 부르주아들을 위한 운동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몇몇 자료들을 조사하면서 세상에 뭐든지 좋은것만은 없다는 걸 알았다. 우리나라의 역사 그 자체에서도 알수 있듯이 여러 가지가 객관적이지 못하고 주관적이며 그에 따라 어떤것은 왜곡되고 어떤것은 부풀려지며 그저 가르쳐주는 데로 배우는 우리는 그대로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이 현실을 깨닫고 약간의 섬뜩함이 느껴졌다. 알려하지 않는게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거 같은데, 이번 발표를 준비하면서 정말 알지 못하는 우리의 과거를 조금이나마 알수있게 되었다. 다른 나라의 역사왜곡에 대해 국제적으로 비판적인 시각들이 많은데 그에 대해 불거져 나오지 않는 우리나라로써 이제부터는 이런 것들이 논문이나 도서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 교
과서에서도 알수있는 그런 객관적이고 현시대를 정확히 조명한 정보들이길 바랄 뿐이다. 아울러 앞서본 정보들을 주축으로 물산장려운동이 근대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각자 생각해 보기 바란다.
참고 문헌
1. 유시현. <나경석의 ‘생산증식’론과 물산장려운동>
2. 강만길, 한국민족해방투쟁사 연구현황과 과제
3. 조기준,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전개과정과 그 역사적 성격
4. 윤해동, <내일을 여는 역사 제5호>
5. 박종린. 2000 <김윤식사회장 찬반논의와 사회주의시력의 재편>
6. 박종린 <192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사상의 수용과 물산장려논쟁 한국역사연구회>
7. 정혜경, <일제시대 좌파계열 민족운동>
8. 전상숙, <물산장려운동을 통해 본 민족주의 세력의 이념적 편차>
9. 동아일보. 1923년 2월 24일
10. 박재창. <평남건국준비위원회 결성과 고당 조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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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9
  • 저작시기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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